잠언의 말씀은 계속해서 의인과 죄인, 선인과 악인,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 게으른 자와 부지런한 자 등을 비교한다.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죄인이 의인이 되고 악인이 선인이 되느냐 있데, 그것에 대해 명쾌히 해답을 주지 않는 것 같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지, 아니면 어떤 교육을 통해 악인이 선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기 힘들다.  물론 어제 말씀 11절에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고 말씀하지만 이 잠언을 썼던 솔로몬 조차도 말년에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기독교계의 드러나는 문제들도 ‘교육’을 통한 변화는 그 근본 해답이 아닌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15절을 보니 이 문제에 대한 해결점이 보이는 듯 하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고 말씀하는데, 공의가 이루어질 때 그것은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지만 죄인에게는 멸망이 된다.  즉 선하고 공의로운 것은 의인에게는 즐거움과 생명이지만 악인에게는 사망선고가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생명과 사망의 차이이고, 악인은 의인이 결코 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롬 6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우리의 구원은 그냥 ‘예수 믿고 천당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나의 옛사람이 끝나는 문제임을 선포한다.  즉 죄인에 대한 해결책은 생활이나 성격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 밖에는 없다.  죄의 열매는 사망이기 때문이다.  죄인에 대한 해결책은 죽음 밖에 없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  그것이 구원이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하고 그것이 그의 자랑이 되었다 (고전 15:31).  내가 얼마나 영적인가 하는 문제는 내가 과연 날마다 죽고 있는가에 달렸다.  나에게 날마다 죽는 것이 없으면 동시에 날마다 그리스도와 다시 사는 것도 없다.  물론 근본적인 중생은 한번으로 족하지만, 그 실재는 매일을 사는 삶을 통해 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을 믿음으로 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완전히 바뀌었지만, 그것을 오늘 경험하고 누리게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죽고 또 다시 일어섬을 통해서다.

 

주님, 인생으로서 어제와 과거에서 자유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주께서 우리의 옛사람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셨음도 알고 감사드립니다.  어제의 모든 실패와 약함 그리고 나의 기질을 죽음으로 끝내고 오늘 하루 새로운 날에 주님과 함께 다시 살게 하셨음을 믿게 하소서.  내게 익숙하지 않은 여러 모양의 귀한 것들, 나의 모난 성격으로는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여러 가지 고상한 것들이 주님 안에서 새롭게 일어난 나의 모습으로 인정하며 변화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