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특히 구약은 거의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들은 왜 이스라엘 역사서를 우리가 읽어야 하느냐며 반감을 품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 (혹은 자기 민족의) 역사 보다 이스라엘 역사에 열광(?)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성경이 독특한 것은, 잘 읽어 보면 단지 이스라엘 민족 뿐이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더우기 다른 역사서들에는 없는 (혹은 있다 해도 신화로 끝나는 것에 비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개입과 인도하심, 그리고 그러한 개입을 위해 필요한 ‘영’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도 27절에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고 말하는데, ‘영혼’의 원어는 ‘네샤마’라는 단어로 창세기 2:9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에서 ‘생기’ 즉 ‘숨’ ‘바람’ 혹은 많은 경우 ‘영’을 뜻하는 단어다.  사람의 타락 이후 영과 혼이 타락해서 ‘영혼’으로 섞여서 겨우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혼’이라고 말하지만 ‘영’과 ‘혼’은 전혀 다른 단어이다.

 

그런데 이 ‘네샤마’ 영이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말씀한다.  즉 타락한 사람이라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영이 있고, 하나님은 이 영을 등불로 삼으셔서 사람의 깊은 속 (배, belly)를 살피신다고 한다.  영은 비밀스러운 것이고 이해하기 힘든 문제이지만,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 사람으로 불어넣으신 그 생기 영은 우리 안에 존재하여 하나님의 등불이 되신다.  고전 2:11에는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하며 신앙 생활의 열쇠는 바로 ‘영’에 있음을 말한다.  예배도 ‘영과 진리로 (요 4:23)’ 즉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하는 것이다.

 

영의 문제는 이해하기 쉽지 않고 사람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문제기에 하나님께서는 삶 속에서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통과하게 하시며 상처를 허락하신다.  30절에는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고 말씀하는데, 폭력을 조장하거나 허락하는 말로 적용하면 종교적 억압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이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처들'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아픔과 슬픔 그리고 실패는 우리의 연약함,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깨닫게 해주어 하나님을 기억하며 바라게 한다.  즉 우리 존재, 실존의 깊은 것을 생각해볼 기회를 허락한다.

 

주님, 삶의 상처는 치유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하지만 그 목적이 ‘육체의 기회를 삼는’ 방종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주께 더 붙어 있게되고 악을 떠나게 되는 것임을 압니다.  영 안으로 더욱 이끄시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