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첫 절부터 ‘가난하여도’ 라고 시작해서 4절 ‘가난한즉’, 7절 ‘가난한 자는’ 그리고 17절 ‘가난한 자를‘ 등 가난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고 있다.  17절의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정작 가난한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가난한 자들의 입장을 말하는 것은 1절, 4절, 그리고 7절의 말씀인데, 그리 좋게 들리지 않는다.  물론 1절은 가난한 상황에 있음에도 성실히 행하는 것이 패역하고 미련한 것 보다 ‘낫다’라고 하며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그것 역시 절대적 긍정은 아니고 비교적인 긍정이다.

 

4절에는 가난하면 친구가 끊어진다고 하고, 7절에는 더 혹독하게 가난한 자들은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고 친구를 따라가며 말하려고 해도 벌써 ‘없어졌으리라’고 말한다.  아, 이게 정말 잠언인가?  도대체 왜 이렇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있는가?  그러면 잠언 기자는 모두 부자가 되야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는 가난의 이유를 15절의 ‘게으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마도 잠언 기자는 게으름이 가난의 이유라고 봤나보다.

 

게으르면 가난해질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중에는 게으른 이들이 많다.  하지만 열심히 일한다고 가난을 벗어나거나 부자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열심히 일해도 더 가난해지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극한 상황에서 일을 해도 하루에 1-2불 밖에 벌지 못하며 여러 가지 이유로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단지 게으름을 그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15절을 다시 읽어보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라고 말씀한다.  즉 게으름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깊이 잠드는 것’이 문제다.  부자들을 보면 정말 하루에 서너시간 밖에 안자고 일에 매달려서 큰 부를 이루는 이들도 많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일을 맡긴다.  그리고 항상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결책을 강구한다.  그래서 옆에서 보기에는 게으르게 보여도 그들은 돈 버는 것에 있어는 잠들지 않고 항상 깨어있다.

 

영적으로도 ‘회개하고 열심을 내는 것 (계 3:19)’ 이 필요하지만, 그 선제조건은 ‘깨어있는’ 것이다.  깨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열심을 내봤자 몽유병같이 허우적 대는 것이다.  그래서 감당해야 할 첫번째 사역은 우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안식은 내가 하려는 것을 그치고 십자가를 적용하는 것이고, 십자가를 제대로 적용하는 것은 동시에 참으로 안식하는 것이다.  사역이 힘들어 질 때, 나는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은혜를 누리는 안식 안에 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아담은 태어나자 마자 놀라운 지혜와 직관이 있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안식을 누린다.  종교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주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쓴다는 말(히 4:11)이 좀 이상하게 들릴 때가 있지만 우리의 첫째 사역은 참된 안식을 먼저 누리는 것임을 믿습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완성을 누리기 원합니다.  오늘 내 안의 종교성을 조금 더 털어내시고, 주님 안에서, 십자가를 지며 행하는 것을 조금 더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