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주간 키르기스스탄에 다녀 오느라 한동안 큐티 나눔을 쉬었습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합니다)

 

(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 이 말씀은 비단 가정만이 아니라 선교에도 적용된다.  적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사람들에게 나눌 것은 더 좋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 외에는 없다.  키르기스스탄이 잘 사는 나라는 아니지만 이번에 가보니 중고차는 좋은 차들이 즐비하여 거리에는 벤즈와 BMW 그리고 렉서스가 가득하다.  그들에게는 물론 다른 곳들도 물질적인 면으로 다가가는 선교에는 한계가 있을 것을 느꼈다.  물론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여러 선교지에서 아직도 돈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시도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각 사람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을 강조했다.

 

(잠 17:2)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에 대해서는 종의 신분이고 생명에 있어서는 자녀, 그리고 장성하여 아들의 명분을 얻는 것을 말씀하는데 (갈 4:5),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거듭났다 해도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 (빌 2:7) 그리스도를 닮지 않고 부끄러운 짓을 한다면 ‘주인의 아들’의 신분이 아니라 ‘여종의 아들’의 신분이 되어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갈 4:30).

 

(잠 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 ‘연단’이라는 말이 원어에는 없는 것 같다.  아무튼 도가니는 은, 풀무는 금을 위하지만, 여호와는 마음을 시험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 단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타는 고통을 통과함으로 나의 본래 타락한 마음은 타 없어지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으로 나오게 된다.  연단의 유익이 여기에 있다.

 

(잠 17: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 듣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악에서 떠나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잠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함 받고 의롭게 되었음을 믿고 영화롭게 되었음을 믿는다면 동시에 다른 이들 역시 하나님 앞에 귀한 자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잠 17: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그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화시기 때문이다.

 

(잠 17:7)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 12:6)’의 말씀이 생각난다.  믿음의 분수에 넘어서는 예언 (혹은 말씀의 선포, 선언)은 거짓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말씀의 선포는 내 어떠함을 넘어서는 것이 있지만, 나는 먼저 그 말씀을 살고 적용하며 누린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함을 본다.  주님, 도우소서.

 

(잠 17:8)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 많은 번역에서 ‘뇌물’로 나오지만 킹제임스 외 몇 개 다른 역에서는 단지 ‘선물’로 나온다.  신약에서는 ‘선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들’ 그리고 ‘은사’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여러 직분들로 나온다.  이러한 모든 은사는 교회 생활을 하게 하고 번영(prosper)하게 한다.  요즘 문제가 되는 ‘번영신학’이 아니라 주의 생명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번영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선물로 주신 많은 분들의 귀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 요즘 기독교의 여러 가지 나타나는 문제들은 분명 ‘허물’일 것인데 이러한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거듭 말하면 친한 벗을 이간하는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죄'와 '허물'에는 차이가 있고, 교회적 차원의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에도 역시 차이가 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17:4)’ 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분명 ‘회개합니다’라고 돌아왔을 때 가능한 것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처럼 사함을 얻지 못한 경우도 있다.  주의 몸을 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잠 17:10)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 항상 문제는 어떻게 미련한 자가 총명하게 되는가에 있는 것 같다.  미련한자를 백 때려도 총명해지지 않지만 총명한 자에게는 한 마디 말이면 족하다.  사람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 안에서 변화를 가져오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총명을 넘치게 하신다. (엡 1:8)

 

(잠 17:11)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 – ‘반역’이라는 단어는 ‘사탄’과 관계가 있다.  반역하는 것은 악한 것이요 대적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있을 때 그 분쟁에 휘말리거나 가담하는 것은 어떤 쪽이든 반역에서 자유할 수 없다.  어느샌가 반역에 ‘힘쓰는’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음부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교회라도 분쟁으로 치닫게 되면 ‘십자가의 사자(메신저)’가 아니라 엉뚱한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사자가 판을 친다.

 

(잠 17:12)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 얼마나 만남이 중요한가.  교회는 지혜로운 자나 미련한 자, 하나님을 믿는 자나 그렇지 않은 자 등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지만 그 안에서 참된 교제가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들 가운데에만 가능하다.

 

주님, 지혜의 말씀인 잠언이 나를 포함한 오늘을 사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온전히 이해되고 경험되고 누려지게 하소서.  참된 지혜이신 그리스도 (고전 1:30)를 붙잡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