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행복입니다’ 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 그런 직설적인 얘기는 별로 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꽤 신선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기뻐하라’는 말씀도 생각났다.  그래서 ‘아, 내가 많이 율법적이었구나.  이제 나의 행복도 좀 챙겨야겠구나. (마치 행복을 챙기지 않았던 것 처럼.  ㅎㅎ)’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 믿는 이들은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의 행복인가?

 

오늘 말씀 3절에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다.  많은 경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사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없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있고, 거기에 나의 모든 것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라고 말씀하는데, 이 단어는 ‘하기아스모스’라는 명사로서 ‘정결, 온전히 드림, 마음과 삶의 성화’ 등의 뜻이고, ‘하기아조’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거룩함을 생각하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다, 외부를 깨끗하게 하다,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얻다, 혼의 정결함으로 내부를 정결케 하다’ 등의 뜻이 있다.

 

그러면서 바로 권하는 것이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색욕을 따르지 말고..’ 라고 말씀한다.  (여기 ‘아내’라고 번역한 것은 ‘그릇’이라는 단어이며 성경에서는 보통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데살로니가 교회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곳에 음란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하나님의 뜻 ‘거룩함’을 말하면서 ‘음란을 버리라, 성결과 존귀 안에서 자기 그릇을 소유할 줄 알아라, 색욕을 따르지 말아라’ 등등을 말씀한다.  (이 ‘색욕’은 2:17 ‘열정’과 동일한 ‘에피뚜미아’이다.  재미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경우 도시는 항구에 접해 있었고 여러 배경의 많은 사람들과 문화가 교차하는 곳이었기에 쾌락과 재미를 좇음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다보니 주위 남들은 다 음란을 당당히 행하고 쾌락을 좇고 ‘행복’을 추구하는데, 믿는 이들은 숫적으로도 많지 않고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을 좇는 것’이라고 한다.  손해보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자는 자들에 관하여’ 말씀한다 (13절).  부활이 있고,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오히려 먼저 일어나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말씀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니 ‘서로 위로하라’고 명한다.

 

참된 신앙 생활은 ‘위로’가 필요하다.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또 정결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나 쾌락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원해서 고난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주님께서 닦아 주실 눈물이 있다 (계 7:17).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것은 세상적으로 조건이 완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명령이 필요한, 많은 경우 힘들고 짜증나는 상황에 접하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이러한 어려운 현실이 성결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경우 이러한 위로가 바로 이루어지거나 적용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말씀을 읽을 때, 특히 부활 신앙에 대해 혹은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오늘 하루 바로 적용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지만, 몇 일이고 몇 달이고 문제가 계속되기도 한다.  그때 그때 적용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바울은 ‘그 날’이 반드시 있음을 서로에게 말하며 위로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소망이고, 이 소망으로 인해 인내가 생기며, 서로에게 위로할 수 있다.

 

주님,십자가를 지는 생활, 부활 생명, 승리하는 생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생활 등이 나의 삶 속에서 적용되지 못할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떠나 여러 모습의 음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 날을 기억하고 그러한 것에서 떠나며, 거기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운 마음에 십자가를 적용하고, 비신자들이 잘 나가는 것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 주의 재림을 바라며 위로를 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