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22절에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 이라는 말이 나온다.  왜 오홀리바는 바벨론 및 갈대아 등을 사랑하다가 싫어하게 됐을까?  여러 번역을 보니‘from whom thy mind is alienated’  혹은 ‘from whom you were alienated’ 등으로 나온다.  즉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그들로부터 오홀리바의 마음이 멀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홀리바가 그들에 의해 소외당한 것이다.   즉 오홀리바가 그들을 ‘사랑하다 싫어하’게 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오히려 그들이 이제 오홀리바를 완전히 무시하고 소외시킨 것이다.

 

오홀리바에게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은 보기에는 멋지고 힘있고 화려하게 보였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솔로몬 시대 때 탁월했던 하나님의 문화는 여러 어려움을 거치면서 이제 그들의 것과 비교해 볼 때 자신들은 촌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겉모습의 화려함을 사모하고 거기에 홀려서 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음행을 행했는데, 그러면 마치 그들의 화려함이 자신의 것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음행을 하면 할수록 그 때 뿐이지 오히려 더 허망하고 공허함을 느낀다.  전에 보기에 화려하고 따를만한 것들이 이제는 싫어진다…

 

세상 문화를 선도하고 주도하던 크리스천 문화가 어느 순간부터 세상 문화에 의해 추월 당하더니 이제는 세상 문화의 화려함을 오히려 좇고 잠식되고 있는 양상이다.  ‘오빤 강남 스타일’이 나오고 얼마 안 있어 ‘오빤 교회 스타일’이 나왔다.  구아무개 ‘목사’의 ‘트로트 찬양’이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세상적인 문화를 이용하면 기독교는 승리할 수 없다.  세상 문화는 어마어마한 자본과 정말이지 목숨을 내놓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바르지 못한 영적인 영향에 의해 만들어 지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가 그 모습을 흉내내서 만들어지면 그들을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한하지는 말아야겠지만, 분별은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더우기 과연 주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실지 생각해 봐야 할텐데, 주님께서는 혹시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주님 외의 것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지만 거기엔 참 만족이 없다.  주님 외의 것을 좇을 때 오히려 그것들로 부터 소외 당하는 것을 경험한다.  나의 정체성을 버리고 원수에게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때 원수는 나를 우습게 본다.  철저히 소외 당한다.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가야함을 깨닫는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주님, 세상의 화려함에 내마음을 빼앗길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참 만족과 가치가 없음을 압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영적 자존심을,  그들과는 다름을 아는 진정한 겸손함을 지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