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실 때도 많지만 특이한 환상이나 계시 혹은 비유로 말씀하실 때도 무척 많다.  오늘 말씀 49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에스겔은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라고 대답한다.  오늘 말씀에 대해 에스겔이 온전히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에스겔로서는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비유가 많았고 에스겔은 그것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사실 오늘 말씀 40절부터 48절까지 말씀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언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가 않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은 예루살렘을 뜻하겠지만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예루살렘은 남유다에 있다.  ‘모아 낼 때’ 또 ‘인도하여 들일 때’ 도 언제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남쪽의 숲’도 왜 ‘유다’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부르시는지, ‘푸른 나무’ 또 ‘마른 나무’는 정확히 무엇인지 듣는 사람이 답답하다.  아마도 에스겔의 대언을 들었던 이스라엘 족속도 그렇고 에스겔 자신도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답답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아.. 하나님 좀 분명하게 알려 주시지.. 도대체 나보고 뭘 하라는 겁니까?  이걸 해야 합니까? 아니면 저걸 해야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도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또 저런 것도 같고…’ 하며 갈등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라,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될 때 이러이러 해라’고 말씀하시 않으신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냥 ‘떠나라’고 만 말씀하셨지, ‘네가 서쪽으로 가면 가나안이라는 땅이 나올 것이다.  거기 가는 중에 하란이 나오는데 거기 오래 있지 마라, 그러면 네 아비가 죽을거야.  어쩌구 저쩌구…’ 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일을 한꺼번에 모두 자세히 정확히 말씀하신다고 과연 내가 그대로 할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순종일까?  그런 생각을 해보면 사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항상 주님을 앙망하는 것이고 그분께 나아가고 그 분께 붙어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것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마 13:34) 제자들이 이에 대해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0)’ 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 13:11)’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3)’ 라고 대답하셨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비유로 되어 있어서 깨닫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함을 말씀하셨다.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앞에 와서 여쭐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비밀이 열린다.  그 때 주님과 동행한다.

 

주님, 주님은 말씀이시고 오늘 제가 붙어 있어야 할 포도나무십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제가 모두 안다면 아마도 주님이 필요없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허락된 주의 뜻 오늘의 분량을 풀어 주옵소서.  제가 오늘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더 나아가기 원합니다.  비유로 답답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숨긴 비밀과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