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면 감정이 격해져서 이성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기 쉽지 않다.  더우기 분노가 일어날 때 흥분하지 않고 분노의 대상에게 조목조목 화가 난 이유를 말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제껏 에스겔 20장의 말씀에서 한 가지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마치 대화가 가능한 대상인 것 처럼 말씀하시는데,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악행을 보면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갓난 아이들 수준이지, 결코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동시에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분노의 이유와, 이스라엘 족속들의 악행과, 심판하시리라는 경고와, 하나님의 바람을 말씀하시고, 그 가운데에서도 언약을 상기시키신다. 

 

보통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기 중심’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자기 중심’에는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가장할 때도 있다.  하나님 말씀에 입각해서 다른 이들이나 자녀들이 그에 반하는 것을 보고 비판하며 분노가 일어날 수 있는데, 슬프지만 많은 경우 그것 역시 ‘내 중심’에서 온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언제 그러라고 했느냐?’ 라고 말씀하셔서 당황하게 된다.  나는 나대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하느라 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걸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이 그랬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도 그러한 것들이 보인다.  물론 내 안에서 제일 많이 보이지만…

 

아이들을 훈육할 때 보통 기준을 정해 놓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혼을 내는 식으로 하는데, 그러한 상황에서는 체벌만이 이루어질 때가 많다.  특히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받은의 훈육은 거의 그런 식이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 처럼 왜 벌을 받는지, 왜 부모가 화가 났는지,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좋고 올바른 것인지 말해주고, 더우기 그 가운데에서도 부모와의 관계가 사랑으로 지속될 수 있는 언약의 어떠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건너 뛰고 양방 모두 빨리 끝내 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런데 빨리 끝내 버리는 것은 관계적인 면, 다른 말로 하면 소위 EQ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요즘은 IQ 보다는 EQ 시대라고들 하는데, EQ 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고 분노의 상황을 잘 관리하는 것이며, 더우기 감정과 지능을 잘 연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이 ‘모든 것’에는 분노 역시 포함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본노 자체가 아니라 그 분노가 어떻게 표출되고 그 에너지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있을 것 같다.

 

주님, 화를 내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겠습니다.  자아는 물론 죽어야 겠지만, 주님이 화내는 것에 화를 낼 수 있도록 성령에 민감하게 하시되, 제 자신이 중심이 되어 판단함으로 화를 내는 것에는 십자가를 적용하게 도와 주소서.  특히 아이들, 배우자 등 가까운 이들에 대한 분노는 온전히 주님의 기준을 따르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훈육하며, 무엇보다 기다림을 배우게 하소서.  저는 인내가 없는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오늘 나의 인내로 붙들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