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시 한번 그 어머니가 헷 사람 (히타이트), 아버지가 아모리 사람이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왼쪽에 위치한 사마리아는 형이고 아우는 오른쪽의 소돔이라고 한다.  소돔은 창세기에 이미 망했지만 위치적으로 예루살렘 오른쪽에 있어 가증한 일을 행했던 장소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당시 북쪽의 이방 세력이었던 히타이트와 아모리, 그리고 앗수르 침입으로 혼혈이 되버린 사마리아 외에 하나님은 다시 한번 소돔을 상기시키신다.

 

소돔의 죄에 대해 보통 성적 타락 혹은 동성욕의 문제로 보지만 그러한 가증한 죄는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고 거기에는 원인이 있음을 오늘 밝히 말씀해 주신다.  그 원인은 바로 소돔이 교만했고, 먹을 것이 풍족했고 태평했다는 것이다.  요즘 동성욕의 문제가 태생적 혹은 선천적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사실은 풍족하게 먹고 힘이 남아 돌아 할 것이 없어지면 무료하게 되어 쾌락을 좇는 결과로 발생하는 면이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성욕 옹호자들은 이것에 과학적인 데어터가 있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선천적이라는 주장 역시 납득할 만한 과학적인 데이터는 없다.  분명한 것은 먹고 사는 것이 빠듯해지면 성적인 죄는 사그러든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쾌락을 좇을 여유는 없기 때문이다.  후진국의 높은 출산율은 이것에 의문을 들게 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 정말 궁핍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베이비부머들은 큰 전쟁을 치른 후에 생긴다.

 

소돔은 이러한 풍족함과 태평함을 누렸고 배가 불러 쾌락을 좇았다.  동시에 그 가운데 혹은 그 주위에 공존하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했다.   영번역을 보면 49절의 ‘교만’은 pride 혹은 arrogance로 50절의 ‘거만’은 haughty라고 번역했다.  49절은 요즘 소위 ‘갑질’로 이해되고 50절의 거만은 ‘안하무인’의 뜻으로 이해된다.  잘 먹고 잘 사니 주위의 어려움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근본적인 소돔의 죄악이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성적인 타락이었다.

 

해방 후 그리고 6.25 전쟁 후 한국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나.  그런데 좀 잘 살게 되자 교만하게 되었고 IMF위기가 터졌다 (물론 여러 외부적 발생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한국 교회는 몇억을 넘어 수백 혹은 천억을 훨씬 넘는 건물을 짓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운데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은 소외되고 외면당했었고 상대적인 박탈감과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재벌들의 갑질에 청년 실업자들은 건강한 가치관을 상실한다.

 

정욕의 문제를 이기는 방법은 요셉처럼 도망가라는 권유를 하지만 사실 정작 상황에 놓이게 되면 거기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매우 순결하고 성숙한 영성을 요구한다.  어마어마한 내공이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이 보혈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 보혈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배고픔 그리고 죽음이다.  그래서 정욕을 이길 힘은 사실 배고픔에서 나온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금식이 필요하다.

 

금식을 잘못하면 굶식이 되기 때문에 아예 금식이 필요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령 세례가 있으이면 물 세례가 필요없다는 이들도 있고, 말씀이 있으니 성찬은 필요없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성령과 물로 거듭나야 하고, 공동식사인 성찬은 모일 때 마다 항상 기념해야 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의식이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혹시라도 금식한다면’ 이라고 하지 않으셨고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 6:17)’고 하시며 금식은 당연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포도주와 음식을 즐기시기도 하셨지만 40일을 주야로 금식하셨다.  또 ‘신랑을 빼앗길 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요즘은 하루 세끼 삼시 세끼 반드시 먹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금식은 나로 주님 앞에 겸손하게 한다.  혈당이 떨어지며 힘이 빠지고 육신의 자랑과 쾌락의 도모는은 그치게 된다.  헝그리할 때 주님을 보게 된다.

 

주님, 이 아침에 아내가 싸준 주먹밥을 맛있게 감사히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먹어도 결국에는 죽는 것임을 압니다.  진정한 생명을 주는 것은 주님 자신이심을 기억합니다.  나의 육신의 힘이 빠지고 영적인 생명이 살아나도록, 때로 기꺼이 배고픔을 택할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