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에스겔서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은 근심할 때임을 본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는 우리가 기뻐해야 하고 근심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 하지만 고후 7:10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말씀하며 영적인 문제에 대한 근심은 오히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말씀한다. 영적인 부분에 분명한 결핍과 모순이 있는데도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그건 뭔가 이상한 것이다.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근심하며 허리를 동이고 주께 간구해야 한다. 지금 우는 자들은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계시록 19장 20절에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마귀인 용보다 더 먼저 불못에 던져지는 이들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짐승과 거짓 선지자다. 오늘 말씀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닌 거짓된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들은 다른 이들의 수고나 고난에 전혀 동참하지도 않고 단지 입술로만 나불대는 이들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계시 받는 것도 가능하지 않자, 무언가 말할 것을 찾기 위해서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 (6절)에 의지한다. 그래놓고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혹은 뜻이라고 사람들을 속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심판을 받는데 그 심판은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며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지도 못한다 (9절). 이러한 심판은 구약에서 많은 죄들에 대해 율법에 기록된 벌이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한다 (6절)'고 했는데, 타락한 인간이라도 처음 창조되었을 때 내재하게 된 인간의 능력의 잠재력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무언가 붙들고 바라고 믿고 되풀이 해서 고백하면 종종 이루게 된다. 즉 사람들이 우매하게 그들을 따르는 이유는 첫째는 그들이 그러한 상황적으로 지도자들이었기에 아무 분별없이 무작정 좇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그들의 하는 말 중에 어떤 것은 이루어지는 것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무언가 이루었다고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오히려 길이 막히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이고 유일한 하나님의 길일 수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로마로 가기 원했지만 '길이 막혔노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고 계속해서 충성했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관점에서는 그의 사역에 많은 고난과 실패가 있었지만 오늘까지 그의 여러 서신서 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계시를 보았고 주님의 말씀을 받은 사도요 선지자였다.

지금은 근심할 때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함을 말할 때 그 뒤의 숨겨진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내 영적 상태의 빈곤을 놓고 주님께 나아가 탄식하며 울어야 할 때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어떠함을 아시고 저도 저의 부족함과 기질의 악함을 압니다. 선지자는 아니더라도 거짓을 말하거나 거짓을 살지 않게 하소서.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저에게 주님의 어떠함을 보여주시고 주의 음성 듣게 하소서. 먼저 나를 돌아보게 하소서. 내 안에 주님의 어떠함을 풍성하게 하소서. 주님 아닌 것을 잃고 또 버림으로 주님 더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