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왜 이리도 심판의 상황을 에스겔에게 미리 상세히 재현하게 하시면서 자세히 말씀 하실까?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여호와인줄 그들이 알리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당신께서 여호와이심을 사람들이 알기 원하시는데 왜 그들을 심판하실까?
3절 후반부에는 ‘..혹 생각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새번역 성경에는 ‘혹시 그것을 보고서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전혀 돌이키실 마음이 없는 심판의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만 동시에 혹시라도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즉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사랑의 부름이다.
벌써 지난 여러 장들을 통해 계속해서 심판의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은 피부에 닿는 위협이나 불안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이 이만큼 흐르는 동안, 환상으로 본 것치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있더냐 (새번역)'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할 것이니, 이스라엘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환상으로 본 것이 이루어질 그 날이 가까이 왔다. (새번역)’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위 선민이었지만 그들을 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고 잊었다. 그들은 여호와가 주시라면 왜 우리를 편히 먹고 살게 하지 않는가? 라고 계속 불평했다. 마치 ‘주’가 먹고 사는데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고 편한 삶을 살 수 있노라 거짓 약속하는 이방신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주’는 ‘주인’이라는 뜻이고 ‘주권자’이시다. 주가 우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 우리의 만족을 위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예배는 먼저 주님의 만족을 구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물론 참된 예배 안에는 상호간의 만족이 충만한데, 주께서 만족하실 때 우리는 비로서 온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25절에는 다시 ‘나는 여호와라’ 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자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이 ‘그가 보는 묵시는 여러 날 후의 일이라 그가 멀리 있는 때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지만 그의 말씀은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기다려도 아직 보지 못한 심판주 예수님의 재림이다. 주님께서 그 날과 때를 알지 못함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저기서 재림의 날짜를 말하고 또 틀렸기 때문에 마치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 처럼 되어 버린 것 같아도, 예수님의 공중 재림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오늘 이 아침에는 ‘더디지 아니할지니’ 라고 하신 말씀이 나에게 도전이 된다. 물론 오늘 내일 재림하실 것은 아닐거라 생각하지만 들림 받는 것과 재림에 대해 묵상하면 결코 먼 훗 날의 일도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주님, 예수님의 주 되심을 무시하고 그 이름을 모독하며 심판을 비웃는 이들을 용서하지 마소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믿지 않기에 그들은 서로 속이고 마음으로 완전히 창조주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주의 백성들을 돌아보시고 우리로 주 앞에 겸손하게 하시며 주의 다시 오심을 신실하게 참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주를 무시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주님을 무시하는 슬픈 죄성이 있는 것을 고백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또 다른 저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시고, 오늘 하루 다시 회개하게 하소서. 단지 환난을 피하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내가 지음받은, 또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고, 주님을 주로 섬기며 주의 생명을 누리기 위한 회개, 주의 만족을 위한 회개를 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