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과 다니엘 그리고 계시록은 서로 연관이 있어서 마지막 때에 대해 많은 것을 계시해 준다고 한다.  오늘 말씀에는 특별히 마지막 때에 대한 내용이 아닌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느낌이 드는데 ‘이마에 표’라는 부분 때문인 것 같다.  계시록 7장과 9장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인침’을 이마에 받은 이들이 죽음을 면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반대로 13, 14, 20 장에는 짐승의 표를 이마나 손에 받은 사람들은 죽임과 심판을 당한다.

 

오늘은 9월 23일, 유튜브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날로 되어 있다.  교황의 역사적인 미국 방문 그리고 그의 특별한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고, 과학자들도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CERN 이라는 기계와의 연관 (구글맵에 오늘 날짜를 치면 사람에 따라 CERN으로 이동한다. 매우 흥미롭다), 매우 많은 영화 속에 오늘 날짜가 마치 계획적인 양 삽입되어 있고, 특히 유대력으로 나팔절이 시작되는데 꽤 오랜만에 돌아오는 특별한 희년의 성격을 띤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오늘이 주님 오시는 날이라고 까지 말한다.  하지만 주님은 지난 2천년 동안 오고 계신다.  또 그 날과 그 때는 알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 24:36, 막 13:32).  더우기 정말 ‘파루시아’로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오시는 주님의 재림은 아직은 아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이마에 표를 얻어 죽임 당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휴거를 당하는 사람들 혹은 마지막 때에 보호받는 사람들에 대한 힌트를 보는 듯 한다.  이들은 특출난 사람들도,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도, 혹은 종교 지도자들, 혹은 자신의 믿음만을 지키기 위해 입산 수도 하는 이들도 아니다.   이 이마에 표를 받은 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개인 구원에 대한 관심을 넘어 오늘 제목처럼 ‘공동체의 죄로 탄식하는 그’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마의 표를 받지 않아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 (6절)’ 등 차별이 없음을 본다.  휴거 혹은 대환난을 다룬 영화들을 보면 아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구원이 있는 것 처럼 되어 있는데, 오늘 말씀을 보니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약 2:14에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하며 구원하는 믿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믿음이 있음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행함’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오늘 말씀을 보니 진정한 구원은 소위 개인적으로 '천당가는' 문제를 넘어 공동체에 대해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것임을 본다.  남의 죄에 대해 자신의 것처럼 아파하며 울부짖는 자들, 이들이 바로 들림받고 보호받게 되는 이들이 아닐까?

 

그런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깨어있음으로 주님과의 동행하는 것이다.  창 5:24에는 최초로 휴거에 관한 것 같은 기록이 나오는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한다.  물론 ‘no more’이라는 말이 반드시 휴거는 아닐 수 있지만 휴거의 방법은 깨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에 대해 그러셨듯, 자신 개인 구원에 대한 관심을 넘어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한탄하며 울부짖음으로 기도한다.

 

아쉬운 것은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11절에 명을 받고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라고 말하는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은 너무 빨리 돌아온 것 같다.  아… 개혁을 외치고 현 기독교의 행태를 비판하고 고발하고, 또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 시대를 위해 울부짖는 자들은 이렇게도 없다.  ㅠㅠ

 

주님, 과연 주님 부르실 때 제가 모든 것을 놓고 기쁨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혹시 가족들과 친구 친지, 세상에 어떠함에 미련을 둘까요?  아니면 거기에도 못 미쳐 들림 받지도 못할까요?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 이 땅에서 허물어져 가는 주의 백성들의 죄를 내 죄처럼 여겨 주 앞에 울부짖는 것임을 봅니다.  저는 저의 문제도 이렇게 버거워 하는데 어떻게 남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까지 울부짖을 수 있습니까?  오직 주의 영으로 가능함을 압니다.  오늘 이 범상하지 않다는 날을 보내면서 주와 동행하게 하소서.  주의 백성, 공동체의 어떠함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위해서 울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