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미리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하게 하시며 그것을 위해 진흙판을 만드는 것과 옆으로 누워 자는 것 그리고 아주 부족한 식량으로 살 것을 명하신다. 에스겔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면 그런 것들을 할 필요도 또 그렇게 살 필요도 없었다. 식량에 대한 부족도 당시에는 아직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했고, 부족한 식량으로 연명해야 했고, 그것은 자원적인 순종의 것이었다.
크리스천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 기뻐하는 삶인데, 그 이유가 세상적으로 복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다. 신약에서 많은 경우 기뻐하라는 말씀이 쓰였을 때,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기뻐하라는 명령을 한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원하신 많은 은사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기복 신앙을 넘어 소위 번영 신앙에서는 세상적인 부와 권세를 얻지 못하면 아예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는 투의 ‘복음’을 전한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세상과 마귀와 종교의 ‘볶음’이다…
말씀에는 서로 나누는 삶을 살 때 비록 가난하지만 풍성한 삶을 경험할 것을 밝히 말씀하고 있는데,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 시대는 구원도 오직 개인적인 구원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왜 하늘 나라를 소망하라고 설교하면서 적지 않는 목회자들은 일반 성도들 중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없는 세상 것들을 누리고 있는가? 본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성도들이 영적인 것 보다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둘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명령을 생각해 보면 도무지 경제적으로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경제적 입장에서 보면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는 것은 그때 뿐이고 오히려 물건 값만 올리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하지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부자들이 그 재물을 투자해서 불리는 것이 거시경제적으로 더 나아보인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은 투자나 이익의 창출이 아니라 하나님 주권 아래 하나님의 백성들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서로 나눌 때 당신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환란의 때는 지역 마다 종종 있었고, 특히 기후적인 변화에 따른 전세계적인 고난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계시록에서는 마지막 때에 심한 기근과 식량 부족을 경험할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자연재해로 인해서든지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 혹은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지 환난의 때가 올 것임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부족함이 부족한 시대를 살고 있다.
자원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 금식함을 토해 나누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 분의 통치하심을 몸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주님, 돈이 조금만 생기면 나를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쓰려 합니다. 연보는 하고 있지만 자원해서 가난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색한 저를 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저도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모든 만물이 주를 위해 창조됐지만, 주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주를 위하심을 깊이 깨닫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