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장에서는 기이한 네 생물의 등장으로 에스겔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2장에서는 드디어 말씀이 임하신다.  에스겔은 요한계시록과 많이 닮았는데, 에스겔도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었고, 요한도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을 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시를 받는다.  요한에게도 하나님께서 특이한 이상을 보여주심으로 그의 관심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역시 오늘 말씀 에스겔도 1장 전체를 할애하여 매우 기이한 생물들의 등장으로 그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요한은 그 놀라운 계시를 보고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고, 전장 28절에 에스겔도 '엎드려' 있었다.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은 환경적으로나 혹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하신다.  큐티를 하는 것도 잘못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고 기도 역시 잘못하면 하나님의 임재 없이 나의 필요에 관심과 촛점을 맞추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뒤 흔들어 놓으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나님 당신 그 분께 관심을 갖게 하신다.

 

재미있는 것은 ‘환경적인 안배’가 분명 있지만, 에스겔도 요한도 이러한 놀라운 사건에는 ‘영’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갑작스런 환경적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게 될 때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배후에는 ‘영’이 있다.  계시록 1:10에는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원어: ‘주의 날에 내가 영 안에 있었다’) 라고 한다.  오늘 말씀 2절에도 ‘그 영이 내게 임하사’라고 말씀하며 네 생물도 중요하고 사로잡혀간 환경적 어려움도 분명 있지만, 그 근본적인 배후에는 ‘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우기 ‘내게 임하사’는 ‘그 영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라는 뜻이다.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영은 함께 간다.  그 영이 에스겔 안으로 들어오시자 에스겔은 또한 2절 이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고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어떤 기록이나 이야기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 말씀이 바로 영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고 하신 것 처럼, 말씀이 바로 영이다.  말씀을 받을 때 영을 받는다.  그리고 말씀 뒤에는 영이 계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인 내용이다.  심판과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다.  이사야 6:8 역시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보낼 사람을 찾아서 자원했더니 주시는 말씀이 심판의 말씀이다.  괜히 자원했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의 의중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정말 심판하고 끝내시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된다.  그럴찌라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지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그 말씀의 의도는 아직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듯 하다.  나에게도 얼마나 말씀을 많이 하시는가…  내가 들을 때도 있고 일부러 무시할 때도 있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그 영을 통해, 그 영 안에서 말씀으로 나를 권고하신다.

 

주님, 나로 영 안에 있게 하소서.  오늘 이 세대와 시대를 파악하게 하소서.  깨어 있게 하소서.  나의 무력함에 관심을 두지 말고,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두게 하소서.  내가 챙겨야할 가족과 사람들도 있지만, 주 앞에서는 오직 주님만 계심을 알게 하소서.  저를 건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