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물질이 필요할 때 도움 받는 것은 매우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많은 물질이 아니더라도, 아니 오히려 먹다 남은 반찬을 싸주시는 권사님의 손길은 너무도 감사하다.  그 음식이야 집에 가져가서 다 먹지도 못하겠지만 그렇게 챙겨주시는 마음이 감사하다.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개역 성경이 ‘했느니라’ 같은 고어체로 쓰여서 바울이 위엄있게 말하는 느낌이 들지만 아마도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도움을 받는 빌립보 교회는 어머니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상한 말을 한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받은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 후원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5:2에 비슷한 말씀이 있지만 그것은 물질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향기롭고 온전하신 제물이심을 말씀하는 것이었고, 더우기 히브리서 여러 곳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이며, 단번에 바쳐진 제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면 왜 갑자기 바울은 이 물질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할까?  이것은 신성모독이 아닌가?  구약 시대야 그 시절 경륜이 짐승의 제물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 단번에 바쳐진 참된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왜 물질 따위를 그렇게 표현했을까?

 

그것은 바로 앞절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고후 8:3에는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말하며 자원함 혹은 후원함이 쓰고 남는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이 힘들어도 힘에 부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빌립보 교회 역시 바울에게 보낸 후원금은 그냥 넉넉한 중에 남는 것을 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아껴서 보낸 것이고, 그것은 다른 모양과 더불어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은 그냥 아무런 괴로움이나 대가를 지불함이 없이 남는 것 중에 조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바치는 것이고, 관제로 부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드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신을 바치셨고, 바울 역시 그렇게 바쳐졌기 때문이다.  제물 혹은 연보 혹은 물질적 후원은 내가 계산해서 남는 것으로 하게되면 별 괴로움이 없다.  괴로움이 없으면 동시에 드리는 기쁨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주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기 원합니다.  이 시대의 바울 처럼 신실한 주의 종 그리고 사역을 보여주시고, 드리는 것에 대해 인색하고 계산하는 저의 어떠함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드리는 물질은 온전히 쓰여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