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참 말이 많다.  아니, 말을 끝내기 힘들어 한다.  형제들에 대한 그의 넘치는 사랑과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벌써 3장 1절에 ‘끝으로’라고 말했으면서 또 다시 4:8에서 똑같은 단어 ‘끝으로’를 쓰고 있다.  3장에서는 ‘기뻐하라’고 말했는데, 4장은 참, 경건, 옳음, 정결, 사랑 받을만 함, 칭찬 받을만 함, 그리고 무슨 덕이 있든지,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한다.  그런데 ‘무엇에든지’ 혹은 ‘무엇이든’에 해당하는 단어는 물론 열거한 8가지는 복수형이지만 하나만 있는 동사는 단수형이다.  바울은 갈 5:22에서도 성령의 열매에 대해 열거했지만 그 동사는 단수로 썼다.  바울은 왜 이렇게 썼을까?  이러한 모든 귀한 것들의 원천은 그리스도 한 분 이시기 때문이다.

 

참 (진리), 경건 (정직), 옮음 (의), 정결 (순결), 사랑 받을만 함, 칭찬 받을만 함 (호평), 그리고 무슨 덕이 있든지 기림 (칭찬)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는데, ‘생각하다’는 ‘셈하다, 상고하다, 추구하다, 고려하다, 결정하다, 묵상하다’ 등 여러 뜻이 있다.  그냥 단순히 생각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으라’ 즉 현재 진행형 명령이다.  세상에서 살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또 추구하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은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잠시 묵상…)

 

그리고 두번째 명령으로 ‘실천하라’가 나온다.  바울에게서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보는 것들을 실천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은 믿는 이들과 항상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그의 임재를 누리는 것은 의를 행할 때, 삶에서 실천할 때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물질적 도움을 준 빌립보 형제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자신은 물질이 있건 없건 만족하며 사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그냥  계속 잘 살거나 혹은 반대로 계속 가난하게 살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다가 가난을 경험하게 되면 큰 고통을 느낀다.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  하지만 바울은 심한 물질적 굴곡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일체의 비결 혹은 비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세상의 것과 다른 영원한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이 주어지면 감사하게 먹지만 그것을 계속 탐하지 않고 그것을 당연히 생각하지도 않으며, 좋은 집에서 살아 보기도 하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필요할 때는 멋진 패션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고 (눅 12:15) 또 능력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의 전환이 좀 필요하다.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어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에도 나에게 자족하게 하시며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고 그것을 선한일의 기회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을 묵상하고 귀한 것들을 상고해야 하는데, 저는 하루 종일 다른 것들에 정신 팔려 있습니다.  오늘 귀한 것들을 추구하게 하소서.  이런 저의 모자람을 용서하소서.  오늘 감사가 넘치는 삶 살게 하소서.  어제는 지나고 새로운 날로 받게 하소서.  귀한 것들을 실천하는 삶을 허락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