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은 짧은 인생을 살기에 바득바득 악착같이 살 수 밖에 없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졌고 이미 그 생명을 살기에 자신의 의나 주장을 내려놓고 주 안에서 하나되어 살 수 있다. 바울은 3장 마지막 부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기에 주님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로 주 안에 서고 하나 될 수 있음을 말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단지 기브앤테이크가 아니다. 저번엔 내가 양보했으니 이번엔 네가 양보해라. 혹은 이번에 내가 하자는대로 하면 다음에는 네 뜻을 따르겠다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됨은 먼저 ‘주 안에 서’는 것이 있어야 한다. 주 안에 서려면 개인적인 면에서 자신은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2절 ‘같은 마음을 품’는 것으로 인도한다.
이 ‘같은 마음’은 2장 5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같은 단어인 ‘쁘로네오’ 즉 ‘기질’에 가깝다.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면, 같은 기질을 갖는 것은 아예 가능하지 않다. 마치 서로 판이한 MBTI 결과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성격을 가지라고 권유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가능한 것으로 말하는데, 기준이 서로 다른 각자의 형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구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시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세상에서 본을 보일 것을 말씀하셨지만, 우선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고 말씀하셨다. 즉 세상 사람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먼저 사랑하고 하나됨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싸우고 상처를 주다가 외부에 대해서는 아무 일 없는 듯 웃는 얼굴로 대한다면 위선이고 그것은 얼마 가지 못한다. 바울도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 6:10)’고 말한다. 믿지 않는 이들은 전도와 착한 일의 대상이 되지만, 믿음의 가정들은 영원히 함께 갈 사람들이다.
4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는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기쁨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바울이나 빌립보의 처한 상황을 보면 별로 기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 같다. 바울은 단지 ‘평안하라’가 아니라 평안을 뛰어 넘어 ‘기뻐하라’고 한다.
이것은 적극성을 나타내는데, 상황적으로 기뻐할 이유가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풍성한 공급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기뻐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심리학에서도 별로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아도 얼굴에 웃음짓고 기쁘게 하면 마음이 좋아진다고 한다. 바울은 심리학이라는 것이 정립이 되기 2천년 전에 사람의 심리를 이해했다. 하지만 단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진정한 현실과 실제인 영적 실체를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믿음 생활인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6절과 7절의 말씀이다. 정말 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고 모든 것에 대해 기도와 간구로 내 구할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주님, 주께서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가까우십니다. 나의 도움이시요 나의 구원이신 주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도 계시지만 내 옆에 또 내 안에도 계십니다. 주를 나의 도움과 힘으로 누리기 원합니다. 내가 높아지려는 것을 포기하고 나의 선호와 기질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먼저 주님을 기다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봅니다. 오늘 주를 기다리며 나에게서 가까우신 주님의 어떠함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