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 1절은 전장 마지막 부분 혹은 전체와 연결된다.  특히 바울의 갈등을 소개하면서 실은 바울 만의 갈등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겪는 갈등과 고난임을 말하는데, 그러한 것에 대해 ‘그러므로’라고 말한다.  그런데 ‘좀 참고 인애하라’ 정도가 아니라 그 정도를 뛰어넘어 적극적인 삶, 하나를 추구하는 삶, 남을 낫게 여기는 삶,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삶,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삶 등 ‘이기는’ 삶 살기를 권면한다.

 

‘권면’이라는 단어를 해설에 보니 성령과 같은 어근이라고 했는데, ‘성령’이 아니라 ‘보혜사’다 (물론 성령이 보혜사지만).  ‘파라클레토스’는 ‘보혜사’라고 번역했는데 보혜사라는 뜻이 감이 잡히지 않는데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를 쓴다.  지키시고 은혜 주시고 가르치신다.  그런데 원어의 뜻은 더 다양하고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요한 복음에만 4번 그리고 요한1서에 한 번 나오는 단어기에 그렇게 많이 쓰인 단어는 아니지만, 그의 변형인 ‘파라클레시스’ 라는 단어는 꽤 많이 쓰였다.  ‘파라’는 ‘옆에 곁에 ~로 부터’의 뜻이고 ‘클레토스’는 ‘클레오’ 즉 ‘부르다 초청하다’의 뜻이다.  특히 행 4:36 바나바의 별명이 ‘권위자’라는데 바로 이 단어이다.  바나바는 권유하고 위로했던 사람이다. 

 

아무튼 바울은 왜 이렇게 장구하게 얘기하고 있나?  교회에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과 삶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께로 돌아간다. 

 

5절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번역했는데, 이 곳 역시 ‘마음’이 ‘하트’가 아니다.  ‘심장’ 혹은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카르디아’로서 매우 많이 사용되었고 여러 가지 경우에 쓰였지만 많은 경우 잠언의 말씀처럼 ‘지키는’ 것이 필요한 단어다.  (자꾸 이렇게 원어를 들먹이는 것이 이 나눔의 공간에서 거치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 뒤에 설명할 ‘기질’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 ‘품어야 할’ 것은 ‘쁘로네오’라는 단어인데 빌립보서에서만 8번으로 신약 성경 전체에서 사용한 거의 1/3 이상이 쓰였다.  이 단어는 ‘총명, 지혜, 감각, 생각, 마음, 의견, 성향, 기질’ 등 여러가지 뜻을 함축하기에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특별히 문제는 없지만 원어에서 ‘카르디아’를 쓰지 않고 굳이 ‘쁘로네오’를 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 안에 이 ‘기질을 품어라’ (한 동사)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것’으로 번역하고 싶다.  그래서 이건 단순한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좀 시간이 걸리는 기질과 성향의 문제다.  그런데 잘 보니 이 동사가 현재 수동태다.  즉 이러한 기질은 현재 얻어야 하고 품어야 하지만, 내 안으로부터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얻어야 할 기질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한번 말씀한다.  내 안에 품어야할 기질과 성향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시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를 소개하는데,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라고 한다.  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아담을 만드실 때 ‘우리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런데 그 창세 이전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태시다.  그런데 뒷 부분이 좀 헷갈린다.  물론 앞의 구절들이 겸손함을 말하기에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로 번역을 많이 했지만, 원어를 보니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는 것이 약탈하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뒤 7절에 ‘그러나’가 붙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리스도는 특별히 다르게 보이지도, 카리스마 있게 보이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원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비우셨다.  고귀한 신분은 커녕 노예의 형태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고, 이제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워 노예의 형태와 사람의 모습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거기에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한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다른 분처럼 말씀하는 것 같지만, 앞 구절에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채임을 말하기에, 이 말씀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 사역, 성향 그리고 기질이 우리에게 본이 되심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기질이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께 무릎꿇고 예수는 주시라 고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은 세상의 빛으로서 선한 일을 행할 때도 물론 가능하지만, 그 원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외칠 때이다.  이러한 외침은 나로 그 분을 본 받아 겸손한 곳으로, 낮은 곳으로 이끈다.  한 없이 높아지기 원하고 좋은 평판 혹은 명예 혹은 체면에 전전긍긍하는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성향과 기질을 추구한다. 

 

예수는 주!

 

주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이 아니라 그 영광 가리는 삶을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지요..  하지만 주님께 붙어있어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비밀인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고,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시며, 예수는 주! 라 외칩니다!  영광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