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어려웠다.  여러 번역본도 보고 연거푸 읽었지만 특히 어제 내용과 연결하여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교리적 혹은 문자적인 면만 보려고 하던 나의 실수를 발견했다.  ‘죽는 것이 유익’이라는 말에 대해 ‘자아의 죽음’만으로 이해했는데, 오늘 말씀을 보니 바울은 정말 육신이 죽는 것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투옥을 한 두번 당하는 것, 특히 젊을 때 감옥가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만, 세번에 이어 네번째 투옥되고, 이제 나이도 적지 않았을 그가 처했던 상황에 대해 그냥 교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나의 비정함과 무정함이 바울이 겪고 있는 육신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고통을 간과했다.  그는 ‘둘 사이에 끼었다’고 하는데, ‘끼었으니’라는 말이 원어로 ‘압박을 받다’라는 뜻인 것을 보면 그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비로서 조금 눈에 들어온다.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가.  가슴으로 받는 것이 필요하다…

 

가끔 몇몇 목회자들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며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실한 목회자들까지 피해가 가는 것은 공평치 못한 일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항상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분들도 육체 안에 사는 형제들이다.  내가 그들과 동일한 상황에 있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것은 사실 온전할 수 없다.  가슴으로 그들을 받고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보여 주신다.  오늘 담임 목사님과 동역 목사님들을 생각하며 위해 기도한다…

 

 

죽는다는 문제

 

어제 말씀 20절에 바울은 자신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배가시키기 (magnify) 원했다.  하지만 동시에 처한 현실은 22절 ‘육체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껏 그의 수고와 사역의 결과, 믿음 생활의 결과다.  은혜와 더불어 동시에 ‘고난도 받게’ 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29절).  그래서 그러한 어려운 상황보다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나았기에 죽는 것을 더 바랐지만, 죽거나 혹은 육체 안에 살거나 하는 문제에 대해 그는 선택권이 없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러한 힘든 상황을 겪고 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인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함을 알고 있었다 (24절)  바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으로 성도들은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5절).

 

어제 말씀 21절에 ‘내게 살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은) 얻음 (입니다)’ 라고 했다.  원어를 보면 동사가 없어서(이 부분 수정.  동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살다'와 '죽다'가 현재형 그리고 아오리스트 동사지만 infinitive 즉 영어의 부정사 같은 것이고 특히 이 부분은 동사적 명사로서 주어격으로 쓰인다)는  마치 고사성어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어 '생주사득' 정도?).  그런데 바울은 오늘 22절에 ‘하지만 내가 육신 안에 살고 있다면 이것은 내게 일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며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와 비슷한 말씀을 한다.  이 두 말씀을 연결해 보면 육체 가운데 사는 이 현실이 일 혹은 사역의 열매이며 또 믿음 생활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육체 안에 살았지만 믿음 안에 살았다.  죽는 다는 것은 오히려 믿음 안에 온전히 사는 것이다.

 

 

시민권자의 삶

 

27절에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는데, 보통 ‘생활하다’라는 말 보다는 ‘행하라’ 혹은 ‘걸으라’는 동사를 많이 쓰지만, 여기서는 행 23:1 과 더불어 신약에 단 두번 있는 ‘폴리튜오마이’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행 23:1의 단어는 ‘살다’로 번역됐는데, 사실 이 단어는 ‘시민권자가 되다’ ‘공무를 보다, 시민권자로 행동하다, 법을 준수하다’ 등의 뜻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착한 행동에 대한 기준을 넘어 근본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에 기준이 있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이것은 또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죽는 삶 (고전 15:31), 자아가 죽는 삶, 육체 안에서 살지만 믿음으로 사는 삶, 그리고 시민권자로 살며 천국의 공무를 집행하는 삶이다. 

 

주님, 신앙 생활에 갈등이 없을 수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 갈등을 넘어 다른 이들의 필요에 더 마음을 갖는, 주의 몸된 교회를 항상 마음에 두는 귀한 주의 종의 본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단지 명목이나 간판 혹은 이름표가 아니라 정말 하늘 왕국의 공무를 집행하고 법규를 따르는 시민권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육체 안에 살아도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소서.  이 모든 말씀 중간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있음을 봅니다.  주 안에서 온전히 기뻐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