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 넷 중에 빌립보서는 제일 마지막에 쓰였다고 한다. 12절 ‘내가 당한 일’ 그리고 13절 ‘나의 매임’ 등은 바울의 투옥됨을 알 수 있다. ‘시위대’로 번역된 단어는 ‘프라이토리언’이라는 단어인데, 보통 ‘궁전’의 뜻으로 쓰이지만 로마 군인들의 막사를 뜻하기도 해서 영어 여러 번역에서는 궁전 혹은 궁전 보초 (palace guard) 등으로 번역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어도 복음을 전파했다.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갇힌 영혼들도 불쌍히 여기셔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다. 세상적인 안목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부끄러움은 잠시 뿐이고 복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영광이 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혔지만 많은 이들은 여러 가지 다른 감옥에 갇혀있다. 매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라는 감옥에, 어떤 사회의 시스템이라는 감옥에, 문화 혹은 여러 인간 관계라는 감옥, 또 과거의 상처라는 감옥 등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믿는 사람으로서 복음 전파의 거룩한 부담이 있지만 현실상 쉽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감옥같이 느껴질 수 있다. 아,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데,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지만 이러한 감옥같이 여겨지는 상황이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보내셨다면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12절은 ‘형제들아’로 시작하는데, 요즘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목회자들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성도’라는 말은 사실 너무도 귀한 말이다. 로만 카롤릭의 ‘성인’과 같은 단어다. 그럼에도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성도’라고 부르고, 좀 다녀서 집사의 직분을 얻으면 ‘집사’로 부른다. 하지만 바울은 ‘성도’라는 단어는 부를 때 쓰지 않고 세상 안에서 믿는 이들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썼다. 부를 때는 항상 ‘형제들’로 불렀다. 그는 소위 ‘평신도’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모든 이들이 그의 동일한 형제들이었다.
바울의 지난 사역을 돌이켜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영광스러운 사역을 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율법이나 할례를 주장하는 등, 신약 시대의 새로운 경륜을 거스르는 많은 이들에 대해서는 신랄히 비판했고,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이제 다시 감옥에 갇히자 순수하게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계속 전파했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옥에 갇힌 것을 트집잡고 하나님이 바울을 버리신 듯 비방하여, 이를 기회 삼아 자신들의 선호에 맞는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 같다.
그들은 ‘겉치레’ 혹은 ‘가식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소위 ‘고구마 전도법’이 생각난다. ‘예수 믿으세요 저~엉말 좋습니다!’ 물론 이런 전도 방법으로 ‘열매’가 있었겠지만, 이건 나에게 가식적으로 들린다. 예수 믿으면 ‘저~엉말 좋’기는 하지만 ‘저~엉말 좋’지만은 않다. 그때부터 싸움 시작이고 세상적으로 보면 별 쓰잘데 없어 보이는 것에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여러가지 거룩한 부담들이 엄습한다. 주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될 때 향유를 부은 사건을 함께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복음은 세상 반 복음 반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듣게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계산적으로 결코 '좋을' 수 만은 없는 문제다.
‘가식’이라는 단어는 profasei라는 단어인데, ‘프로’라는 단어와 ‘빠이노’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재미있는 것은 ‘빠이노’라는 단어는 전혀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빛을 비추다, 빛으로 가져오다, 나타나다’ 등의 뜻이지만, ‘프로’가 합쳐져서 ‘가식적’이라는 뜻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단어는 ‘선지자’를 의미하는 단어 ‘프로뻬테스 profetes’와 너무도 흡사하다. ‘앞’이라는 뜻의 ‘프로’와 ‘말하다’의 뜻이 합해져 ‘선지자’를 의미하고 동시에 ‘말해내다’를 의미하는데, 바울은 그와 비슷한 ‘프로빠세이 (원형 프로빠시스)’라는 단어를 쓴다. 의미심장하다. 바울은 그들을 말장난으로 되려 비꼬는 것 같다. 자신들이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투기나 다툼으로 하기 때문에 그들은 선지자 같이 보이지만 결국은 ‘가식적’이 된다. 물론 바울이 이런 소심 복수를 할리는 없겠지만 그의 단어 선택은 나에게 그런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바울의 관심은 소심 복수가 아니라 결국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었다. 자신의 명예나 평판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다. 바울의 힘은 오직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공급하심이 구원 안으로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살든지 죽든지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의미요 목표였다.
21절에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한다. 많은 경우 이 구절을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읽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나는 결코(!) 그리스도를 살 수 없다. 내가 열심히 그리스도를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종교다. 내가 무언가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또 할 수 있다는 착각이 종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처럼 포장하는 것이 종교다. 나는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회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게 사는 것’이 된다. 뒷부분 번역이 아주 잘못됐는데,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가 아니라 ‘그리고 죽는 것이 얻는 것이다’ 가 맞다. 감옥에 있다가 할 수 없이 죽어도 나에게는 이익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는 ‘죽어야 한다’라는 뜻이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얻는다.
주님, 주님…. 주니~~임.. ㅠ ㅠ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절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