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음녀는 누구길래 이렇게 자주 등장할까? 이 이방 여자는 얼마나 세길래 ‘ 내 아들’ 혹은 나 자신이 좇아가면 결국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그런데 잘 읽어보면 이 이방 여자가 센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손도 들릴라를 이기지 못했고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도 성적인 면에서 실패를 했던 것을 본다. 성적 유혹을 이긴 예는 요셉의 경우가 생각 나는데, 그는 그 상황에서 도망침으로 죄짓는 것을 피하고 승리했다 (그리고 결국은 옥에 갇히고, 후에 총리가 된다). 그런데 정말 현실에서 ‘도망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특히 혈기 왕성할 때는 도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정욕을 좇기도 한다. 물론 건강한 이성교제는 필요하지만 요즘 그런 좋은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아마 그래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 것 같다.
솔로몬은 1절부터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고 말함으로 성적 유혹에 대해 대비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 2절에서는 ‘지켜 살며’ 즉 평상시에 말씀 따라 사는 생활, 눈동자, 손가락 마음 판 (3절) 등 우리 몸과 피부에 느낄 정도로 말씀과 하나되야 함을 강권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어떤 ‘부적’같은 느낌도 든다. 노란 종이에 빨간색으로 이상하게 표시한 부적. 보통 집 안이나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부적은 그 내용을 알지도 못하지만 단지 지니고 다니면 악운이나 악귀를 쫓는다는 미신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부적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그냥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 뭔가 안심이 된다. 말씀이 새긴 반지나 목걸이 혹은 팔찌 등을 지니고 다니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영적인 부적이다. 전혀 효과가 없다. 말씀은 ‘마음 판에 새기라’고 하고 그 ‘계명을 지켜 살’아야 함을 명확히 한다.
말씀이 먼저 내 안에 온전히 자리 잡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 가치관과 논리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말씀을 내 정욕과 타락한 논리를 바탕으로 해석해서, 혹시라도 성적인 문제에 대해 말씀에서 다르게 말하고 있는 부분은 없나, 이 잠언을 쓴 솔로몬도 무수한 아내들과 첩을 두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물론 모세 또 다윗까지 여러 아내를 거느렸다는 점 등을 생각해 내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부부 개념에 대해 비껴가려고 한다.
‘음행’이라는 말도 성경에서는 음란, 음욕, 간음 등 여러 가지 단어로 되어 있어서 혹시 결혼 하기 전까지는 문란한 성생활이 문제 없고, 또 성경에서 창녀 혹은 남창 등에 대해 그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한 것 같다는 해석으로 그것은 필요악이며 오히려 큰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라고 구차한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되는 동성욕에 대해 예수께서는 동성욕에 대해 그 어떤 입장도 보이지 않으셨으므로 괜찮다는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동성욕자에 대한 사건이 나오지 않았지만 만약 나왔다면 분명 주님도 그 죄에 대해서는 요한 복음 8장의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 대해 '정죄하지 않'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고 분명히 하셨던 것 처럼 단호한 입장을 밝히셨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정말이지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마 6장에서 ‘금식할 때에’ 라고 하신 말씀은 ‘만약 너희가 혹시라도 금식이라는 것을 하게 될까봐 얘기하지만’이 아니라 ‘너희는 모두 기본적으로 금식을 하지 않느냐? 금식할 때는 말이지…’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고소할 건덕지를 찾기 위해 이혼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세의 입장에 대해 얘기할 때 주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마 19:8)’고 하시며 ‘본래’를 말씀하신다. ‘본래’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요 그리스도인의 태도다.
또 하나, 주님께서 동성욕에 대해 언급이 없으셨다고 다른 제자들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영어 성경 중에 주님 말씀만 빨간색으로 인쇄한 책들이 있다. 주님의 말씀을 다른 내용들과 차별화 하고 더욱 드러내기 위한 의도는 알겠지만 과연 주님께서 직접하신 말씀만 주님 말씀이라면 성경의 대부분은 필요없다.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 안에서 (원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분명히 한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말한 제자들도 포함한다. 즉 성경이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라고 하며 제자들의 말이 주님 안에서 선포될 때에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다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계시록 마지막 장에는 이상한 내용이 있는데 어떤 ‘천사’가 말씀을 전하고 자신은 ‘함께 된 종’이기에 자신을 경배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전하는 내용 특히 13절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 말하며 그 천사가 마치 주님 당신같이 말을 한다. 그는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의 종, 말씀 받은 제자들의 대언의 권위는 그리스도와 동일하다. 그런 동일한 권위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욕이 죄악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적 부적이라는 것은 없다. 부적처럼 가지고만 다니고 말씀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의 정욕을 합리화 하기 위해 이용하려 든다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 (벧후 3:16)’게 된다. 오직 분명한 말씀에 따라 삼가야 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시 119:9)’
주님, 세상에서 마음과 생각이 더렵혀질 때 주님 말씀 조차 내 정욕대로 맞추어 해석하고 내가 멋대로 말씀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성적인 순결에 대해서 저는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저의 타락한 기질은 주님 말씀보다는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동성욕은 물론이고 그 외 로마서에서 열거한 모든 죄악들은 나의 모습입니다. 오직 주께서 저에게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주셔야 합니다. 이러한 연약함을 주 앞에 내놓사오니 주의 말씀을 내 마음 판에 새기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다시 씻으심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