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지혜라는 단어가 더 많이 나온다. 그런데 갑자기 전도서 말씀이 생각난다. 전도서에도 지혜라는 단어가 22번 나오는데, 1장 18절에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하면서 지혜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다. 아마 시간적으로 전도서가 솔로몬의 말년에 쓴 것 같은데, 잠언 특히 오늘 말씀에서는 지혜의 탁월함에 대해 계속해서 말한다. 과연 어떤 것이 맞을까?
둘 다 맞다. 성경 말씀에서 대립해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보완하고 있다. 오늘 말씀에서 지혜는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 혹은 염세주의로 빠지게 하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땅에 터를 놓으셨을 때 일하던 지혜를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는 허무로 인도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을 펴시고 땅에 기초를 세우신다. 인간의 지혜는 비관으로 인도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행복’으로 인도한다 (13절, 18절).
인간의 지혜를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똑똑한 이들이 은과 금과 권세를 얻을 수 있었지만, 요즘은 돈 있는 사람들이 똑똑한 이들을 고용한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정주영은 무수한 학박사를 고용하지 않았나? 그래서 지혜보다는 돈, 특히 돈 버는 시스템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나아보인다. 오히려 돈이 지혜와 장수를 옆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똑똑함’ 혹은 '얍삽함'이지 지혜는 아니다. 똑똑함은 이윤을 추구하지만 지혜는 정의를 추구하고 서로 살리는 관계를 모색한다. 그래서 세상 지혜는 결국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다 (18절).
이 ‘생명나무’가 무엇인지 21절 이하로 자세히 나오는데 놀라운 말씀이다. 오늘 말씀 구절에서 히브리 말로 ‘지혜’는 모두 같은 단어 ‘호크마’를 쓰지만 유독 21절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부분에서는 ‘투시이야’ 라는 다른 단어로 쓰였다. 그런데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reality이다. 즉 ‘호크마’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지혜는 ‘소피아’지만 유독 21절에 쓰인 단어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 주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실 때 사용된 ‘진리, 알레떼이아’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우리 말 성경에는 예전에 ‘진리’라는 단어에 대해 밑에 주석으로 ‘혹은 참’이라고 달아 놓았었는데, 이 ‘참’이라는 것이 바로 영어의 reality이고 오늘 21절의 지혜이다. 흠.. 소름이 끼친다. 지혜를 말하면서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를 언급하고 이제 ‘참’에 대해 말한다.
이 ‘참’은 우리 성경에서 ‘진리’로 영어에서 truth라고 많이 번역했지만 동시에 reality 즉 ‘실제’이다. 주님은 이 ‘실제’와 은혜, 은혜와 실제가 충만하셨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제가 아니다. 사람의 시야는 정말이지 너무 좁다. 빛의 스펙트럼 중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의 영역은 지구와 태양 사이 거리가 빛의 전체 스펙트럼이라고 할 때 한 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영적인 실제가 참된 실제이다. 그래서 전에 요한계시록 말씀이 생각난다.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전개되는 (혹은 이미 전개되어진) 많은 것들, ‘영 안’에 있을 때 사도 요한이 본 많은 것들이, 바로 진짜 ‘실제’이고 참된 현실이다. 지혜는 실제이다. 이 실제, 진리, 지혜가 충만하신 그리스도 예수께 다시 눈을 돌린다.
주님, 잠언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봅니다. 주님만이 영원하고 세우시는 지혜시고 진리이시고 참된 실제이십니다. 잔머리를 지혜로 오해하지 말게 하소서. 참된 지혜이신 주 앞에 나아가 생명 나무를 만지기 원합니다. 오늘 근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를 잡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