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방금 전 말씀에 '새 사람'을 말하면서 이제는 행동 자체에 대한 문제를 거론한다. 왜 그럴까? 이상한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자연히 모든 행동이 변할 것 같지만 우리의 사회, 문화적, 가정적 그리고 내 자신의 기질적인 면에서 경험해 온 다양한 가치관은 죄에 대해 그리 민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하나님만' 사랑하면서 살면 남에게 피해주거나 욕하거나 거짓말하거나 툭하면 화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들이 이상하게 안될 때가 많다...
그래서 바울은 이 '그 새 사람'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 준다. 첫번째가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말하라'는 것이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 받은 새 사람을 입'었기에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그 새 사람' 안에서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서로 지체이기 때문에 남을 해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자신을 해하는 것이 된다. 동시에 남을 위한 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나서 '분'의 문제를 말한다. 26절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라고 하는데 원어를 보면 '화 냄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지만) 죄를 짓지 않는다 너희 분냄 위에서 해가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재미있는 표현을 한다. 분내는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유머감각이 있다. 야고보서 1:20 에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말씀해서 전혀 화내지 말라는 말씀처럼 들리지만, 19절에는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씀하며 급한 화가 아니라 좀 더딘 화를 '권유?' 하고 있다.
사실 살면서 아예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다. 주님께서도 몇몇 문제에 대해 화를 내셨지만, 만약 화를 전혀 내지 않는다면 감정적 결핍이나 문제가 있는 것이다. 화를 내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어떨 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화를 낼 수도 있고, 정의를 위해 화를 낼 수도 있으며, 거룩한 화를 낼 수도 있다.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유와 방법, 그 과정 그리고 결과가 중요하다. 물론 정작 상황 속에서는 잘 되지 않아 쉽게 화를 낸 것에 대해 또 실망하고 그렇게 쉽게 화를 낸 자신에 대해 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화를 내는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아무튼 화를 내는 것이 목적을 상실하는 죄를 짓는 것과 연관될 수 있는 문제이기에 바울은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데, 바울의 유머스러운 문장처럼 좀 삶에 여유와 유머를 갖게 되면 나아지지 않을까?
20대 초반에 어떤 행사를 주관하는 팀에 있었는데, 어린이 민속 무용단이 늦게 참가하느라 저녁을 먹지 못했다. 준비실에 김밥 몇개 사놓은 것이 있었는데 무용단 단장은 그것을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었지만 같은 스태프가 먹지 못하게 하자 크게 화를 내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나는 빨리 그냥 드시라고 먹는게 무슨 잘못이냐고 웃으며 달래 주었고 분위기는 다시 수그러졌다. 당시 그 스태프는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아.. 그 때 그 여유와 유머는 어디갔나? (ㅎㅎ)
많은 경우 공동체 안에서 화낼 일이 생기는 경우는 차별된 대우를 받는 듯 서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다. 그래서 '마귀에게 틈을 주'는 구실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화를 내는 문제는 사실 심각한 것인데, 이 분이 라는 것이 잘 조절되지 않으면 쉽게 사라지지도 않고 오히려 속에서 불길이 솟는다. 바울은 단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자. 생각과 영에 눈을 돌리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가 별 일도 아닌 것에 대해 급히 화내고 언성을 높인 것에 대해 회개하고, 회개 하고 난 후에는 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용서하자. 그래서 난 주님이 필요한 것 아닌가...
'새 사람'을 입고 이 '한 새 사람 (엡 2:15)'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제 과거와는 다르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 하면 안된다. 동성욕을 행하는 이들도 주님을 믿으면 더 이상 정욕을 목적으로 살 수 없다. 물론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고 내 힘과 결단 자체 만으로는 정욕과의 싸움에서 항상 패하지만, 이 '한 새 사람' 안에서는 가능하다. 그 외 열거된 이 모든 악한 것들과 권유의 말씀 역시 '그리스도 안 (32절)'에서 가능하다.
주님, 죄에 대해 민감해 지는 것은 나의 양심이 살아 있고 영이 재가동 된 것임을 알고 용기를 얻기 원합니다.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해 길들여지지 않고 계속해서 주의 말씀으로 민감함을 더하게 하소서. 쓸데 없는데 분과 열정을 품지 말게 하시고, 사랑하는데 열심을 낼 수 있게 내 안에 은혜를 더하시고 이 '한 새 사람'인 교회에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더욱 넘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