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앞의 구절들을 근거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즉 앞의 모든 진리를 선포한 후 그러한 실제를 바탕으로 기도하는데, 보통 기도는 이미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 우리에게 경험되도록 기도하기 때문에 그의 기도의 본은 매우 도움이 된다.
14절에 ‘족속’으로 번역된 ‘파트리아’라는 단어는 크게 ‘나라’ ‘족속’ 등의 뜻도 있지만 ‘가정’의 뜻도 있다. ‘아버지’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즉 여기도 ‘가정’의 개념이 있는데, 땅위의 현존하는 가정 뿐만 아니라 하늘의 모든 (every) 가정에게 이름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앞에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16절을 원어로 보면 다시 eis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그 크신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는 것이 우리 속 사람 ‘안으로’ 공급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보통 ‘주여, 힘 주시고 능력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 어떤 힘인지, 무슨 능력인지 또 어떻게 주어지는지 잘 모르고 기도할 때가 있는데, 바울은 그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 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그 크신 영광의 풍성함이 먼저 있고, 그의 성령을 통해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는 것이 우리 속 사람 안으로 주입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기도하는데, 사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에 계시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롬 1:28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고 기록됐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 조차 항상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디 계시니 하고 물으면 많이들 자기 마음을 가리키지만, 하루를 돌아보면 정말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실 때가 얼마나 있었는가, 아니 내 안에 계시긴 하시는가 라고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보통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깊은 곳, 영 안에 계신다고 한다. 영 안에 충만하셔서 마음으로 까지 오셔야 하는데, 그 열쇠는 바로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실때 다음에 오는 것은 아가페 안에서 뿌리가 내려지고 또 터가 굳어지게 된다. 더 이상 왔다갔다 하는 신앙이 아니라 뿌리가 내려지고 터가 굳어지게 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깨닫고’ 또 ‘알게’ 되는데, 깨닫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성도들과 함께’라는 대목이 나에게 도전을 준다. 나 혼자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얼마인가를 잘 깨달을 수’ 없고, 또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도 없다. 깨닫고 알려면 모든 성도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내가 깨달은 그 입체적인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내가 알게 된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낌 없이 나누어야 한다. 숨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다’라는 대목이 재미있다. ‘지식, 그노시스’이라는 말은 ‘알다, 기노스코’의 어원이기 때문이다. 즉 아는 것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행하실 수 있는 분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교회 안에서 그에게 영광이 시대의 시대의 세대 '안으로' 있을지어다. 아멘. 이라고 끝을 맺는다. 3장은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어디서 어디로 얼마나 흐르는지 강력하게 보여준다.
주님, 제가 좀 더 깊은 ‘앎’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요.. 오늘 AJ 모임에 주님 함께 하시고 정말 서로가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에 저를 비춰보게 해 주세요. 서로가 나눌 때 더 깊은 교제와 아는 것을 초월한 앎 안으로 인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