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때문에 큐티 나눔이 좀 게을렀고, 에베소서 큐티 나눔이 좀 늦어졌다. 개인적으로 큐티 나눔은 오늘 할당된 것을 하지 않으면 폐기되는 것이라고 생각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열왕기 하의 사망이 가득한 내용에서 갑자기 놀랍고 고귀한 에베소서로 뛰어 넘게 되어 미뤘던 나눔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수신자와 발신자이다. 예를 들어 구약은 거의 대부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였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명하신 것들을 지금 은혜 시대 교회나 비신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누군가 동성결혼 혹은 동성욕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역비판하여 구약에서는 부모에 거역하는 자녀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따라야 하는가,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정 민족의 씨를 말리는 전쟁을 명하시는 여호와의 명을 오늘도 따라야 하는가 하며 비아냥 거리지만, 율법을 따르거나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혹은 ‘유대교인’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동성욕에 대해서는 지금 은혜 시대에는 더욱 엄중한 경고가 있다. 이 문제는 야고보서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 이므로 열 두 지파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으로서의 우리들에게 대한 적용에는 '조금'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는 느낌이다.
에베소서의 발신인은 ‘바울, 곧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안아 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이고, 수신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즉 수신인은 당시 에베소 지역의 성도들은 물론이고 이 편지를 읽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을 포함한다. 구약의 말씀도 오늘 읽으며 성령의 깨우치심으로 새롭게 받고 적용할 수 있는 것 처럼 신약의 말씀 특히 에베소서는 바로 오늘을 사는 나를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1장을 처음 읽는 에베소 성도들은 무슨 느낌을 받았을까? 그들은 이방인에게 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 (2절)’와 더불어 원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평강’도 함께 얻게 된 것을 보고 감격해 하지 않았을까? 참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고, 그로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에 대해 뿌듯하지 않았을까? 이번 여행을 하면서 묵상한 것은 나의 구원도 감사하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더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더불어 그 안에서 함께 창조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 분을 아는 것은 참으로 생명보다 구원보다 낫다. 아니, 그것이 바로 생명이고 구원이다.
에베소서는 정말 놀라운 진리가 함축되어서 구절 하나 하나가 귀하지만 1장에서 계속 반복된 것 처럼 보이는 구절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라는 부분이다. 6절, 12절, 14절에 계속 반복된다. 6절은 찬송하는 것, 12절은 찬송되는 것, 그리고 14절은 모든 것의 결과로서의 영광의 찬송이다.
각 구절을 원어로 보면 조금 다른 인상을 주는데 거기 모두 ‘eis’라는 전치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 eis는 앞 구절과 맺어지게 하면서 계속적으로 조금 더 점진적으로 깊이 또 높이 우리를 인도한다. 전형적인 바울의 문체이다. (마치 일본어의 ~노 ~노 ~노, 즉 ~~의 ~~의 를 쓰면서 계속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1장에 eis가 처음 쓰인 것은 5절의 ‘양자, 휘오떼시안 (아들+되다, 혹은 위치시키다)’ 앞인데, 즉 ‘아들의 위치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는 뜻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좋아하는 킹제임스 역의 번역이 좀 만족스럽지 못하다. adoption of children 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바로 뒤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그 ‘안으로 eis’를 또 쓴다. 즉 아들의 위치 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온다.
그런데 6절로 이어지면서 우리 개정역에는 ‘이는’으로 시작하며 앞 구절로 연결되지만, 원어에서는 다시 ‘eis’를 쓰며 더욱 안으로 들어간다. 즉 아들의 위치 안으로 들어오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것은 결국 ‘그의 사랑 받는 자 안에 우리를 은혜롭게 함의 안에서 그 분의 은혜의 영광의 찬송 안으로’ 인도한다.
12절 역시 11절 말씀의 기업과 예정을 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 안으로’ 또 ‘되는 것 안으로’ 계속 되어짐을 말한다.
14절은 바울의 입장에서 ‘우리’에서 이제 에베소 성도들인 ‘너희도’ 역시 그렇다 라고 말한다. 즉 이 eis가 이제 너희에게까지 미쳤다는 말이다.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었는데, ‘그 얻으신 것을 속량’ 하는 것 안으로 (eis), 그리고 결국 ‘그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 안으로 (eis)’가 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우리 신앙이 점진적으로 깊어지는 결과가 ‘찬송’이고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eis’의 결과는 ‘교회’라고 한다! 아놔, 이런..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주님, 과연 이 에베소서의 영광의 찬송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영광을 조금이라도 누리기 원합니다. 바울이 봤던 그 점진적인 깊어짐과 영광스러운 높여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원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교회와 머리이신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주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즉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면 얼마나 순종하는데 도움이 될까 생각해 보지만 만약에 그런 식이라면 쥐를 가지고 조건 실험하는 것과 차이가 없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쥐같이 시험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지각을 사용함으로 선악간에 분별하기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