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은 보이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이다. 장님 (요즘은 시각장애자?)이 아닌 이상 외부 세계를 감지하는 것 중 눈이 90%라고 하는데 역시 우상을 감지하고 섬기는 것도 보는 문제에서 시작한다. (아마 그래서 기도할 때 눈을 감는 듯)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1, 2항에서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듯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제일 중요한 계명으로 주셨다.
호세아 왕은 당시 상황을 외교적인 노력으로 풀어보려고 했지만 그의 시각은 좁았다. 나의 주어진 상황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지혜를 짜내어 해결 방안을 모색하지만 나는 상황의 모든 면을 볼 수 없다. 나의 시야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 제한된 시야를 바탕으로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편협되고 제한된 시각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이스라엘의 죄를 열거하는데,
첫째로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함 즉 삶의 궁극적 목적을 상실한 문제,
둘째로 하나님 말씀 외 이방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율례를 따름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고 짐으로 여겨지는 하나님 말씀 보다는 현실과 타협하고 그런 것들을 좇는 것, 다시 말해 ‘회개함’ 즉 생각과 가치관을 바꿈으로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현실과 타협하는 것,
셋째로 산당을 세움 즉 하나님을 떠남으로 아쉬워지는 종교적인 안위와 만족에 대한 필요를 채우는 것,
넷째로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우’는 즉 종교적 만족을 넘어 여기 저기에 쾌락을 추구하도록 리마인드하는 것들을 설치하는 것,
마지막으로 우상을 섬김, 즉 다른 우상에서 적극적으로 행복을 빌고 추구하는 것으로 완전 패역해지는 것 등을 말씀한다.
결국은 이방에 끌려가서 고생하게 된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자원해서 고생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나오는데, 복음을 위해 묶임 (혹은 매임, 엡 6:20, 골 4:3, 딤후 1:16) 자신의 모든 권리를 쓰지 않음 (고전 9:18), 복음 안에서 즐거워 하는 (롬 5:11) 참된 천국의 차원을 말씀한다.
주님, 오늘 하루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제 자신의 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자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