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나 그 외 여러 가지 인재를 포함한 사고 사건 등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런 해석이 가능할 수 있지만 그것은 구약적인 해석이지 이제 은혜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적합한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해석을 좋게 받아 들인다면, 극히 제한된 우리 인생을 되돌아 봄으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좋은 경고와 권유임에 틀림없다.

오늘 3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라는 구절을 읽으며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인간에게, 아니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자주 노하시나, 지겹지도 않으시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것인데 계속해서 노하시고 벌주신다.  나같으면 정말 피곤할 것 같다.  노하고 성내는 것도 보통 스태미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노하시거나 벌 주시는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무 관계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나는 노할 필요가 없다.  그냥 보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관계를 지속해야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가족 혹은 자녀들에게 잘못된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 효과적인 표현과 소통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약 1:20에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성품에 대한 말씀으로, 어떤 때는 적절한 화를 내는 것이 효과적인 표현이 되기도 한다.  특히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소위 ‘거룩한 화’를 내면 더욱 그렇다.

최근 동성혼에 대해 논쟁이 많고 정말 미국은 이제 완전히 하나님을 떠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믿는 이로서 성경적 배경으로 동성혼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미 정치적으로 통과한 것에 대해 성경을 기본으로 논쟁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그 정해진 대로 가서 결국은 멸망할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이들과 교회는 더욱 내실을 다져야 한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듯 동성혼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은 역효과가 더 있을 것 같다.  보수는 교회 내에서 먼저 시작하고 부흥 역시 교회 내에서 먼저 시작해야 세상을 비판하고 구할 수 있음을 본다.  보수되지도 않은 그물로 고기를 잡을 수는 없다.  누가 그랬듯이 미국의 남은 희망은 오직 부흥밖에는 없고 부흥의 시작은 회개다.  

주님, 주님의 생명 없이는 또 기독교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압니다.  주께서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이스라엘에 노하시듯 오늘 우리를 징계하심으로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혼동 가운데 믿음 잃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시련 속에 큰 부흥이 있게 하소서.  부흥은 오직 주께 속해 있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 부흥을 가져 오시고, 미국에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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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히 12:6-10)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