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은혜로 우리는 다르다 (히 10:26-39)
26절에 개정역은 '짐짓'이라는 말을 썼는데, 마치 실수 혹은 마음에는 그렇지 않은데 할 수 없이 죄를 지었다는 식으로 들리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원어 Ἑκουσίως는 '고의적으로' 혹은 '일부러'를 뜻한다. 즉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그 진리의 그 지식을 그 받음 후에 우리가 일부러 죄를 범함에 더 이상 죄들에 대한 제물이 남아있지 않다' 라는 의미다. 이것은 당연한 것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생명을 주신 이유는 더 이상 하나님을 떠나 죄 짓지 않고, 진리의 지식을 따라 순종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는 가끔 범하게 되는 실수나 죄들에 대해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한 죄들에 대한 해결책은 요일 1:9 '우리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하지만 26절에서 말씀하는 죄들은 주님을 배반하는 지경까지 가는 것인데, 지난 6장 4-6절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다. 27절 역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다소 번역이 아쉬운데, 마치 그렇게 고의로 주님을 대적하고 떠나는 이들이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기독교인이었다가 완전히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이들에게 주님의 긍휼은 아직 남아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그들 중에 정말 '두려운 마음'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이다. 그래서 킹제임스흠정역은 (그들에 대해) '대적들을 삼킬 불 같은 격노와 심판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이러한 죄가 무엇인지 29절에 자세히 나오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라고 한다. 이것은 주님을 이제 더 이상 믿지 않고 주님의 공로를 무시하고 부인하는 이들을 말한다. '예수 믿어봤자 별거 없네' 라고 비아냥 거리는 이들이다. 이러한 죄가 얼마나 큰지 30절은 갑자기 '원수 갚는 것'을 말한다. 진리의 지식을 받음에도 회개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면 주님의 원수가 되고 그러한 원수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친히 갚으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말은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교자들에 대해 하는 말이고, '우리'는 '그러나 멸망 안으로 물러가는 (이들)이 아니라 혼의 보존 안으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39절은 선포한다. 이러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한데 '인내 ὑπομονῆς'는 문자적으로 '견뎌냄'이다. 그런데 이 말은 소유격 명사이며 '필요'는 목적어로 쓰였는데, 단어들 자체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들리지만 수식하는 동사 즉 '소유하다'는 현재진행형 능동태이다. 할 수 없이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 (34절)'고 '큰 상 (35절)'이 있으며 '약속하신 것 (36절)' 등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인내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고 능동적으로 인내하는 것이 성도들의 믿음이고 신앙 생활이다.
주님, 많은 이들이 신앙 생활을 하다가 포기합니다. 소위 가나안 교인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는 이 때에, 참된 진리의 말씀과 교회 생활이 생겨나게 하소서. 성령의 주되심과 주관하심, 그리고 하나되게 하심을 믿습니다. 약속하신 그 놀라운 것들을 더 살펴보며 그러한 것들을 미리 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