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약속들과 아직 받지 못한 그 약속 (히 11:32-40)
11장에는 '약속'이라는 말과 '받다'라는 함께 나온 구절이 4개 있다. '약속'은 동일한 단어 '엪앙겔리온'이지만 지난 13절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라고 했는데, '약속'은 복수 즉 '약속들'이며 '받다'는 아오리스트 동사구이다. 즉 그들은 약속들을 받지 못했다.
17절의 '약속들'도 복수이고 '받다'는 암시적인 누림을 뜻하는 ἀναδέχομαι라는 동사구이다. 오늘 33절 '약속을 받기도 하며' 역시 복수이며 '받다'는 ἐπιτυγχάνω로 '위' 혹은 '겉'을 의미하는 ἐπι와 '이르다, 발생하다, 만나다, 기회가 생기다, 누리다' 등을 의미하는 τυγχάνω에 아오리스트 직설법 즉 과거를 의미한다.
그런데 39절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에서 '약속'은 단수이며 정관사가 붙어 바로 특별한 '그 약속'을 의미하고, 동사는 κομίζω로 '보살피다, 가져가다, 짊어지다' 등의 뜻에 시제는 아오리스트 직설법으로 과거를 말한다. 그런데 이 동사 '받다 κομίζω'는 19절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에서도 쓰여서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까지 '믿음으로'는 한 단어로 '여격'이었지만 33절과 39절의 '믿음으로'는 성경에 자주 쓰였던 '믿음을 통해 dia'로 되어 있다. 그들의 삶은 '그 믿음을 통해 증거되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그 약속'에 대해서는 '받지 (부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to) 또 믿음으로 (with, through) 여러 모양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선진들이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의 '그 약속'을 지향하는데, 그것은 아직 과거 신앙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즉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지만 (39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미리 보셨는데, 우리를 떠나서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 (40절)'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뭔가 더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예전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에 비해 하나도 나은 것이 없는 우리들에게 '그 약속'을 실체화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한다.
빌 3:11에는 바울이 그 자신의 신앙의 여정과 그 싸움에 대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증언하는데, 바울의 모든 믿음에 대한 분투는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만 믿으면 부활할 것이라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단순히 종교 생활하는 이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to) 또 믿음으로 (with, through)' 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주님, 평생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 주님을 믿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 약속'을 다시 묵상하고 더 사모하기 원합니다. 현실 안에서 참된 실재를 볼 수 있게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