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시선을 계속 고정시키며 나의 더러움이 폭로되어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거룩케 하심을 의지함 (히 12:1-11)
1절은 허다한 증인들이 둘러싸 있다고 있지만 정작 그들 중에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증인되었다고 예를 든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가 해야할 것은 '경주'인데, 먼저 '벗어 놓는 ἀποθέμενοι' 것이 필요하다. 이 말은 바로 2절 '바라보다 ἀφορῶντες'와 발음상 대조되는 것 같이 들린다. 경주를 제대로 하려면 잘 뛰는 것 외에도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하는데, 첫째는 몸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하고 또 무엇이든 방해하는 혹은 얽어매는 것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무거운 것'은 상황적으로 나를 방해하는 요소들 즉 내려 놓아야 할 것들이고, 얽매이기 쉬운 죄 (단수)는 기본적인 영적 문제이며 죄책감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믿음의 경주를 잘 해내기 위해서는 상황적이고 영적인 문제에서 해결받아야 한다.
2절은 마치 명령형 혹은 권유형으로 번역되었고, 물론 그러한 의미겠지만, 원어로는 동사구로서 '바라봄으로' 정도가 되겠다. '바라보자 ἀφορῶντες'는 단지 그냥 보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다른 곳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들을 주님께로 '돌려'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현재진행형 명령어로, 나의 시선은 습관적으로 주님을 떠나 세상을 바라보게 되지만, 계속해서 눈을 돌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라는 의미다. 그 이유는 바로 '믿음' 때문인데, 여기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며,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 자신이심을 말한다. 경주를 하기 위해선 소위 finish line이 어디인지 계속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과거 '시크릿'이라는 책자가 인기를 끌었는데, 전형적인 뉴에이지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내가' 바라는 것에 집중하게 한다. 여기에도 어떤 면으로 '믿음'의 원리가 숨겨있고 지난 11장 1절 말씀과도 비슷하게 들리지만,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주님과 멀어지게 하는 매우 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자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그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 끝 혹은 완성 역시 주님에 의한 것인데, 이 말은 계 22:13 '시작과 끝이요'와 동일한 단어다.
12장의 첫번째 명령으로 나오는 단어는 3절 '(깊이, 충분히) 생각하고 있으라 ἀναλογίσασθε'인데, '낙심하지 않기 위해' 깊이 생각함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앙 생활에는 계속 낙심하게 하는 요소들이 발생하는데, 세상 기준이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화내거나 짜증부리거나 혹은 해결 방안을 찾으려 하는 것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우선은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결국 낙심 받는 원인은 신앙 생활 자체에 있고, 이것은 주님을 섬기려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 있다.
4절 번역이 아쉬운데, 피 '흘리는' 이라는 말은 없고 그냥 '피'라는 말만 있다. 즉 '(너희가) 피까지 대항하지 않았다 그 죄에 대하여 싸워지고 (이태동사) 있다' 정도가 되는데, 문맥상 '피 흘림'을 연상하게 되지만, 정말 싸우는데 '피 흘림'까지 필요할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난 9:22에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했는데, 거기에는 분명 '피흘림 haimatekchusias'으로 되어 있고 그것은 주님의 단 한번 피흘리심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다시는 그러한 것이 필요 없음을 강조했던 구절이다. 문제는 '아직 Οὔπω' 라는 단어가 있어서 '앞으로는' 을 암시하고 있고, 주님께서 해결하신 동일한 '죄 (단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죄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이미 해결하시고 이루셨지만, 우리 삶 가운데 그 실체를 취하기 위해 싸워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5절 이하 '징계'를 언급한다.
보통 '징계'라고 하면 무언가 잘못한 일에 대해 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국어 사전에도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함'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παιδεία라는 단어는 '어린 아이를 양육하다, 훈련하다, 바르게 하다' 등을 의미한다. 즉 단지 책망이 아니라 분명한 '완성' 즉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훈련이나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들' '사생아' '친아들' 등 '아이'에 대한 예를 드는 것이다. 벧전 2:20에는 '죄들을 지음으로 (원어 참조)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하지만, 믿음의 삶을 살다보면 나의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닌 여러 시험이나 고난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나에게 '훈련'이 되어 믿음의 '성장' 혹은 '완성'을 이룬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는 정말이지 '피까지 대항하는' 정도로 그 죄에 대해 싸워야 함을 말한다. 주님의 왕국의 실재 처럼 '이미 그러나 아직은 already but not yet'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싸우다' 동사는 이태형 즉 내 힘만으로 능동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권위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징계, 훈련, 고난 혹은 시험등은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올 때 '경히 여기지 말라 (문자적으로 멸시하지 말라)'고 또 '낙심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흥미로운데, 개정역은 '꾸지람을 받을 때에' 킹제임스는 '책망 받을 때에' 등으로 번역했지만 원어는 ἐλεγχόμενος 로 '드러내다, 책망하다, 꾸짖다' 등이다. 사실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게 되면 나의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것들이 노출되며 폭로되고 드러나게 되는데, 나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 특히 믿음의 형제 자매들 앞에 발가벗은 것 처럼 드러나게 된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구나' 하며 낙심할 수 있지만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이러한 드러남을 통해 나는 더욱 성화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절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고 말한다.
결국 이러한 훈련 혹은 폭로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조정하고 '연단 (훈련)을 받아'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데, 원어에는 '평화로운 열매가 의를 내어준다'로 되어 있다. 싸움이나 훈련의 마지막이 평화 (혹은 평안)이 되어야 의의 열매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주신 힘으로 싸워야 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주님, 싸움이 싫습니다. 싸우기 두렵고 힘들 것을 알기에 미리 포기합니다. 하지만 싸움이 없으면 승리도 없고 성장도 없음을 봅니다. 피까지 대항하며 싸워야 할 필요를 보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그 온전함을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하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를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