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님 (히 12:12-17)

12절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에서 시제는 수동태 완료형이다. 형용사가 아니라 각각 완료형 동사구인데, 이미 손과 무릎이 피곤해졌고 연약해졌다는 의미다. 신앙 생활은 기쁨만 가득하고 모든 것이 우리 바라는대로 형통만 하는 삶이 아니다. 거기에는 항상 수고가 따르고 믿음 없는 사람들은 겪지 않아도 될 시험들이 계속 도전해 오고 유혹들이 밀려온다. 계 3:8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는데, 그들의 능력은 작았고 따라서 일하는데 힘이 들었겠고 손이 피곤해졌고 무릎이 연약해 졌겠지만 주님의 말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에 주님께서 인정하신다.

'세우라'는 명사는 아오리스트로 일방적 명령이라기 보다는 권유이다. 힘들고 지친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닥달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하지만 능력으로 권유하고 있다.

13절 '곧은 길'에서 '길'은 보통 쓰는 '호도스'가 아니라 성경 여기 단 한번 나오는 τροχιά가 쓰였는데, 이 단어는 영어 track의 어원이고, 1절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와 연관이 있다. 정해진 길 즉 경주할 때 달리는 길 혹은 마차 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파인 길, 혹은 바퀴가 파서 만들어 낸 길 등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달려갈 길은 우리 마음대로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선진들에 의해 이미 파인 길, 주님께서 예비하신 길, 끝이 분명히 있는 길을 말하고 있다. 1절에도 '우리 앞에 당한'의 '당한'은 '놓인'의 의미다.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사역하든 아니면 선교지에서 섬기든 소위 '선구자' 혹은 '개척자들'이 아니라 다만 주님 가신 길, 선진들의 길을 따라가는 것 뿐이다.

14절은 원어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평화 (혹은 평안, 화평 - 모두 같은 단어 에이레네 임)와 거룩을 좇고 있으라 이것을 떠나서는 아무도 그 주를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정도로 되어 있는데, 개정역을 포함 여러 다른 한글 번역본들은 '따르다'라고 번역해서 그냥 걷는 정도를 생각하게 하지만 원어 '디오케테'는 빨리 뛰어 좇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계속 경주 혹은 달리기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 여정 역시 그냥 유유히 걷는 것이 아니라 달음질 해야 하는 것이다. 빨리 뛰는 것에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하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평화를, 그리고 거룩은 주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거룩'과 동일하게 남성 단수 명사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은 개정역이 킹제임스흠정역 보다 더 낫게 번역했다) '주님을 보다'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인데,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은 더 이상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던 나약한 분이 아니시다.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인생이 함부로 다가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거룩을 추구하고 이룰 때에 주님을 볼 것임을 말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거룩은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고전 13:12)'만한 거룩이다. 주님께서 아버지와 동일하심 같이 우리도 그 때는 주님과 동일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물론 그 거룩에 대해서만이고, 그 '신격'은 아니다. 이것이 타 종교 특히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에 비해 기독교가 특출난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15절은 흥미로운 단어가 등장하는데, 한글 여러 번역본에는 제대로 된 번역이 없다. '하시오' 혹은 '조심하시오' 등으로만 번역되었는데, 원어에는 '감독하다 ἐπισκοπέω'로 되어 있고, 딤전 3:2와 딛 1:7의 '감독 ἐπίσκοπος'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감독'이라고 하면 일을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원래 의미는 '보살피다, 돌봐주다, 감정하다' 등이다. 지금 소위 '감독'으로 세워진 사람들에게 이러한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과 무릎이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서로를 감독 즉 돌아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쓴 뿌리'라는 말이 한동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관점으로 이해해서 교회 내에서도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보다는 과거 경험 등에서 오는 좌절감이나 죄책감 등을 해결하려는 시도에 인용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문맥상 전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계속해서 경고하는 것은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이들 즉 주님을 배반하려는 이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쓴 뿌리'는 같은 선상에서 과거 종교 생활의 어떤 면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진리와 은혜를 떠나면 세상으로 가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과거 종교 생활로 돌아가서 '더럽게' 되고 만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서로 '감독'하고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16절은 갑자기 '음행'을 말하는데, 성적 음행의 의미도 있겠지만, 역시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는 영적인 음행을 말하는 것이다. 원어에는 '음행하는 자들'과 '망령된 자들'이 붙어 있는데, 이 둘 모두가 은혜에서 떠난 자들을 말한다. 에서를 예로 드는데, 원래 장자권을 갖고 태어났지만 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다.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 25:32)'라고 말하며 장자권을 우습게 여겼다고 하는데, 아마도 장자권은 판다고 해서 팔 수도 없고 변하지 않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 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많이들 설교하고 또 그렇게 믿지만, 그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입장에서이지 미래에 대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유한한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따를 뿐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계속해서 이렇게 경고하는 이유는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17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는 원어로 '이스테' 한 단어로 되어 있는데, 동사 원형은 ἴσημι로 '알다'를 의미하지만 행 26:4와 여기에서만 쓰인 매우 희귀한 단어다. 흥미로운 것은 명령형에 완료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정말 찾기 쉽지 않은 것이다. '~하라'와 '했다'를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에 '너희들도 알지 않는가?' 정도의 뜻이 되겠다. 이미 우리가 창세기 기록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알라는 의미인데, 다른 것이 아니라 '장자권'에 대해 포기하면 눈물로 구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장자권'은 계속해서 말하는 '유업' 혹은 '상속권'인데 '그 복'을 상속하는 것이고 이는 다름 아닌 은혜되신 그리스도시다.

주님, 너무 많은 때에 믿음에 대해 타협하고 현실이나 상황의 어려움을 핑계로 주님 보다는 세상 안위이나 쾌락을 선호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내 삶 가운데 있기 원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