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통해 (히 13:1-8)

1절은 원어로 '그 빌라델비아φιλαδελφία를 머물게 하고 있으라' 이다. 즉 '형제 사랑'은 계시록 1:11과 3:7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원어 Φιλαδέλφεια) 교회와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다. 앞 부분 philos는 '친구'를 의미하며 phileo는 친구 사이의 친밀함을 가리키는 사랑이다. 이 말은 '아가파오'와는 다른 말로 '친함' 혹은 '친밀함'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 교회로서 우리는 형제들과 (또 자매들과) 주 안에서 친밀함으로 함께 교제해야 하는데, 이러한 친밀한 사랑에 대해 갈 6:10은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1절의 이러한 명령 (현재진행형)과 더불어 2절은 '잊지 말라 (역시 같은 현재진행형)'라고 하는데 바로 '손님 대접'이고, 이 말은 '모르는 이를 사랑 (philos)함'이라는 의미인데, 뒤 '대접'이라는 말 역시 '모르는 이를 맞아 들임'이라는 의미고 공통적으로 ξένος 즉 '모르는 사람' 혹은 '외부인' 등을 의미하는 단어가 포함되었다. 이 말은 영어 xenophobia 즉 외부인에 대한 공포를 의미하는 단어의 앞부분과 같은데,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타민족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배척하기 마련이다. 1절에서는 친밀한 형제들에 대해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2절에서는 그것만이 아니라 친밀하지 않고 생면부지 외부인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맞으라는 명령이다.

현대처럼 고대로 발전한 사회, 특히 테러 위협이 만연한 상황에서 타국인들 혹은 난민들을 아무런 심사도 없이 원하는대로 다 받으라는 의미일까? 그래서 여기에 지혜가 있다. 1절 말씀처럼 우선은 형제들이다. 형제들이 먼저 서고 준비가 되어야 외부인들 역시 따뜻하게 맞을 수 있다. 이러한 말씀은 기독교가 국교도 아닌 상황에 국가적 방침에는 적용할 수 없는 문제고, 오직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다. 좌파들은 이러한 것을 빌미로 자신들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난민 유입에 적극 찬성하며 법률을 도입하려 하는데, 먼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3절은 소위 '역지사지'를 말하는데, 전반부는 '상기하라 투옥자들을, 마치 함께 투옥당한 것으로 여김으로' 정도가 더 나은 번역일 것이다. 학대는 우선 몸에 대한 것인데, 동일하게 몸을 가진 우리들은 다른 이들이 학대 받는 것에 대해서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믿는 이 각자가 상기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실천은 몸된 교회가 해야 한다.

4절은 '결혼은 모든 것 안에 존귀한 (것)'이라고 하는데, 주의 일을 위해 고자된 자들도 있고, 사도 바울은 고전 7장에 결혼하지 말라는 권유를 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결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은 언약이고 특히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기 때문에 '만유 안에 존귀한' 것이다. 딤전 4:3은 말세에 '혼인을 금'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데, 사람들은 결혼 제도를 무시하고 아무하고나 쾌락을 목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뜻이며 바로 이러한 것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이다. 결혼 안에서의 올바른 부부생활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무시하는 음행자들과 간음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5절은 금전적 문제에 대해 쉽게 말해 현재 상황에 만족하라는 권유인데, 여기에 명령어는 없고 '돈을 사랑하지 않음'은 형용사구이고 '돈을 사랑함 (딤전 6:10)'과 동일한 단어 앞에 '아님'을 뜻하는 a가 붙은 단어다. '족한' 그리고 '있는 바'는 모두 동사구로서, 아마도 각자 금전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명령 보다는 이러한 형태로 권유한 것 같은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족하다 ἀρκέω'로 현재진행형 수동태로 되어 있다. 즉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계속 불만스러운 사람들도 있지만, 받은 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는 딤전 6:8 말씀 처럼 물질의 유무는 '만족'의 문제다. 하지만 궁색함에 계속 처하는 것도 별로 좋은 것은 아닌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궁색한 것이 마치 영적인 것이라며 고집하는 것도 혹은 계속 호화로운 삶을 즐기는 것도 아닌,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 (빌 4:12)'우는 삶이며 그 목적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 (빌 4:13)'음을 아는 것 즉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5절은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6절로 부언 설명한다.

7절은 '기억하라 너희들을 인도하고 있는 이들을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던 (이들을) 그들의 행실의 결말 (문자적으로는 행동의 나옴)을 숙고함으로 그 믿음을 모방하라'고 되어 있는데, 먼저 '기억하고 있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들이 죽을 때 세상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의 죽음에 비해 어떠했는지, 그래서 '그 믿음 (단수)' 즉 '그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도 따랐던 바로 '그 믿음'을 모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 그리고 오늘 같으시다 또한 영원들 안으로'라고 말씀 하는 것이다. 즉 바로 '그 믿음'을 추구하며 모방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바로 '그 믿음'이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주님, 이렇게 거룩한 삶을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소서. 원수는 가라지를 뿌리고 가라지는 알곡들과 함께 자란다고 하셨지만 진정 주님의 생명 안에서 거듭난 이들을 모으시고 그 안에 형제 사랑으로 충만케 하소서. 주님의 집을 심판하시고 정결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