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입술들의 고백하고 선포하는 열매로 주의 왕국이 온전히 임함 (히 13:9-17)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한다. 이제까지 배반하지 말라 돌이키지 말라고 계속 권유했는데 9절은 또 다시 '여러 가지 다른 교훈들(가르침)에 끌리지 말라'고 한다. 한 하나님이시고 진리가 하나이며 몸이 하나이듯 가르침 역시 하나이고 그것은 은혜에 기반한다. 종교는 내가 무언가를 행하거나 혹은 해냄으로 성취감을 추구하도록 노력하게 하지만, 은혜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 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끝내셨고 또한 베푸셨음을 말한다.

그래서 10절은 우리가 제단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장막에서 섬기고 있는 자들은 그로 부터 먹을 권위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제단 역시 장막에 속한 일부분이지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제단'은 그래서 과거 계속해서 짐승들이 희생되던 장막이나 성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다만 같은 원리를 볼 수 있다면, 여러 제물들의 형태와 제사법이 있지만 그 중 '번제'는 짐승의 피를 받아 성소에 뿌리고 그 고기는 완전히 '영문(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 처럼 주님께서도 '(성)문 밖에서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원어에서는 '나아가자'가 아니라 '나아갈 수 있도록 (가정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치욕을 짊어져야 할 때가 올 수 있다는 의미이며, 바로 히브리서가 기록된 상황을 가리킨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고 있을 것은 '영원한 도시'인데, '추구하다'는 현재진행형 능동태로 되어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가오고 있는 도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일인데, 이 ἐπιζητέω라는 말은 단지 무엇이 어디 있나 두리번 거리며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묻다, 추구하다, 부지런히 찾다, 갈망하다, 요구하다'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미' 임한 왕국이지만 동시에 '아직은' 이 땅에 오지 않은 그 왕국을 이 땅에 이루도록 부지런히 구하며 요구하며 기도하며 세운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의 노력으로 세워지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믿는다는 우리에게 이러한 갈망이 없다면 그 왕국은 오고 있는 것이 늦춰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5절은 '그러므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제물을 하나님께 (우리는) 드리고 있을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하고 있는 입술들의 열매이다'라고 하는데, '제물'과 '열매'는 모두 단수이다. '입술들'은 복수 즉 우리 모두가 다른 입술들로 말하고 찬양하고 있지만, 그 제물됨과 열매는 하나임을 말한다. 이러한 찬양의 제물을 드림과 입술들의 열매는 바로 위 '왕국을 추구함'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매일 고백하며 찬양하는 것은 주님의 왕국의 임함과 그를 적극적이고 열심히 추구함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나 사업 혹은 건강 등을 놓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이 온전히 이 땅에 임할 것을 놓고 적극적으로 입술로 고백하며 추구한다.

16절은 이를 위해 '잊게 되지 말라'고 명하는데, 현실적으로 이러한 추구함은 바로 '선행'과 '교제'로 가능하다. '선행' 즉 '착한 일'로 번역된 εὐποιΐα는 말 그대로 '좋다'를 의미하는 'εὐ'와 '행하다'를 의미하는 '포이에오'의 합성어이며 여기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다. 그에 비해 '서로 나누어 주기'로 번역된 단어는 소위 '코이노니아'로 문자 그대로 κοινωνία이다.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의미하는데, 그래서 단순히 필요한 물질을 서로 나누어 준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고 영적인 어떠함을 공유하며 서로 세워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실체를 경험하며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이러한 '나눔'을 행하는, 즉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이다.

'순종하라'는 의미는 '설득당하라' 즉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이해하여 그 받는 말씀에 동의하라는 것이다. 무조건 순종하며 아멘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설득당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복종하라'로 번역된 단어 ὑπείκω는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말인데, '거부하지 않고 양보하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양보'하라는 것인데, 정말 신실하게 인도하는 자들에게 할 수 있다. 악한 종, 소위 '양들'에게 다 시키고 자기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양보할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도하는 자들'은 정말이지 두렵고 떨림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래서 '인도하는 자들'은 원어로 '헤두메노이스'로 되어 있는데, 능동태가 아니라 이태/수동태로 되어 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생각으로 형제들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도당함으로 인도하는, 즉 주님께 먼저 '설득당하고' 또한 그들의 삶을 '양보함'으로 다른 형제들의 그러함을 이끄는 자들이다.

히브리서에는 '십자가'라는 말이 6:6과 12:2에 두번 나오는데, 모두 부끄럽고 수치스러움을 대표한다. 가끔 설교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을 하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말이 없다. 다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그리고 오늘 말씀에는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절)'라고 한다.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지는 이유는 그 자체가 멋져 보이기 때문이나 혹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십자가를 져봤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일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기를 지는 이유는 오직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그 목적이다. 십자가는 '종교'로 변질될 수 있지만, 이제는 육체로 알지 않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추구하는데, 그 분은 참으로 진리이시고 영문 (종교) 밖에 계셔서 그에게 나아가는 자를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 주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몇 명을 얻으소서. 주님께 설득당하고 자신들의 삶을 주께 양보하는 이들을 얻으소서. 함께 진정한 선행을 하며 교제하는 그러한 무리를 주님 세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