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핵심과 다른 복음을 받는 이유 (갈 1:1-10)

원어 1절은 '바울은'으로 시작한다. 바울은 사도인데 그의 사도직은 사람들로 부터나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이다. 그냥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인데, '와 kai' 라는 말은 and를 의미하는 동시에 also라는 뜻도 가진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같이 놓는 것은 의미심장하고 벌써 '복음'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한 후 바로 2절은 '그리고 나와 함께 한 모든 형제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라고 하며 발신인과 수신인들을 밝힌다. 보통 성경에서 '교회'라고 할 때는 거의 대부분 단수지만 여기에는 '교회들'이라고 복수를 썼는데, 보통 한 도시나 성읍에 있는 믿는 이들에 대해서는 단수인 '교회'라고 하지만, 갈라디아라는 지역은 꽤나 넓은 지역이기 때문에 각자 독립적인 특성의 '교회들'이 존재한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계 1:4) 역시 각 도시에 있던 교회들이기에 복수로 쓰인다. 그에 비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서 각지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는 모이는 장소가 한 곳일 수도 혹은 여러 곳일 수도 있지만 한 성읍안에 있을 때 여러 다른 모임들에 대해서도 단수인 '교회'로 불린다. 이것은 올바른 '복음'이 전해질 때, 각자 모이는 시간이나 장소가 다르더라도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3절에 다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구약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엘로힘'이고 '주'는 '여호와'이다. 그런데 이 둘을 다시 함께 놓음으로 비밀스러운 엘로힘 즉 투 떼오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주이심 즉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함께 함을 말하는 것이 된다. 원어에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데, 과거 구약의 인사는 '샬롬' 즉 평강이었지만, 이제 '은혜'가 먼저 나오는데, 은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리가 알고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혜가 없으면 엄밀히 말해 평강은 있을 수 없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누히 '평강' 혹은 '샬롬'이라고 문안했지만 진정 샬롬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온다. (원어에는 '원하노라'는 말은 없다)

4절 역시 흥미로운데, 원어로는 '그 분은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주신바 되어 하나님과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 악한 현재 세대로 부터 우리를 건져 내시려 (하셨습니다)' 정도로 되어있다. 개정역이나 여러 한글 번역본에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 있는데 '곧'으로 번역된 단어가 위의 kai이다. 즉 이 말은 앞의 단어와 더불어 연결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하며 설명하기도 하는데, '하나님과 우리 아버지'는 둘이 다른 분이 아니라 하나이심을 말한다. 즉 위 1절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원어에는 1절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곧)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비밀스러우신 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시다.

바울이 말하는 참된 복음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며 그가 '하나님과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 악한 현 세대로 부터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주신바 되 (원어 참조)'었으며, 그가 부활하셨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설명한다. 이러한 진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하심으로 신성을 인성으로 가져오셨고,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인성을 신성으로 이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구원은 단지 지옥 신세 면하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은 사실 너무도 놀랍고 은혜로운 것이라서 오히려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받기 힘든데, 그래서 소위 '다른 복음'이 생긴다. 주님의 참된 '그 복음'이 아닌 다른 것들은 모두 '다른 복음'인데, 수없이 많은 '다른 복음들'이 있겠지만, 이것은 결국 주님의 은혜를 떠난 것으로 다 같은 것들이며, 따라서 단수의 '다른 복음'이 된다. 소위 '진품'과 '짝퉁'만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 성도들이 너무도 쉽게 이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이상히 여겼는데, 사실 또 다른 새로운 '하나 another'가 아니라 '왜곡 (메타스트렙사이)'된 것이다. 소위 '토속화' '현지화' 등등을 거론하며 죄인들을 복음에 맞추려 하지 않고 복음을 현지 상황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복음은 왜곡되고 변개되며 또 다른 종교로 변질되고 만다. 갈라디아라는 넓은 지역 역시 토속 종교들이나 이미 존재하던 여러 종류의 종교 혹은 미신들이 횡행했을 텐데, 다만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을 뿐이지 그 내용은 토속 종교나 미신과 차이가 없는 것들로 변개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우리'건 '하늘의 천사'건 혹은 그 누구건간에 '저주가 되어라!'고 명하는데 이러한 말이 8절과 9절 두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복음이 우리의 생각이나 상황이나 현실에 잘 맞지 않는다고 다른 복음을 취하거나, 특히 이러한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가 될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 '저주 ἀνάθεμα'라는 말은 '보관하기 위해서 남겨둔, 심판이나 제사를 위해 남겨둔, 멸망을 위해 남겨둔, 저주, 혹은 저주 받은'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이 현 세대에는 혹시 벌을 받지 않는다 해도 이제 다가올 영원한 세대에는 결국 멸망당할 것을 말한다.

10절은 바울이 그 일생을 통해 사도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좋게 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좋게 하다 πείθω'는 문자적으로 '설득하다, 잘 구슬리다'등을 의미하는데, 이제까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해왔다면 (미완료, 즉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니었을 것이다 (역시 미완료)라고 한다. 그는 그의 사역에 있어서 복음과 그 전함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아래 종되었음으로 계속 해 온 것임을 밝힌다.

주님, 복음이 받기 힘든 것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기 때문임을 봅니다. 이 복음은 세상 그 어느 종교의 가르침과도 다르고 회개하지 않으면 받을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복음을 떠나 다른 것을 좇아가는 헛된 노력을 막으시고 주님 안에서 형통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