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복되거나 타협하지 않는 복음 (갈 2:1-10)
바울은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 갔지만 뭔가 아쉬웠던 것이 있었다거나 혹은 무엇을 따로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시'를 통해 올라갔다고 증언한다. 당시 유력자들 특히 유대교인들이나 과거 친인척들은 물론이고 오히려 교회 안에 유명한 이들 즉 다른 사도들 등을 만나서 의논하거나 권위를 인정받으려 하지 않았다. 바울이 받은 소명은 단 하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유대인들 밖의,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요 10:16)'이기 때문에 주님의 확실한 부르심 외에는 다른 자격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방인들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해서 조차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흐려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할례(자)' 문제가 있었다. 할례는 유대교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여러 제사들과 더불어 반드시 요구되는 종교의식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도 그 뿌리가 유대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과거 행하던 여러 율법들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거짓 교리가 지속해서 교회에 도전이 되었다.
이러한 거짓 교리는 '거짓 형제들'이 들여왔는데, 헬라어 ψευδάδελφος는 ψευδής (가짜, 거짓말)과 ἀδελφός (형제)의 합성어로 '가짜 형제들'이라는 말이다. 모임에 참석하고 겉으로는 형제들 같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는 아니었는,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는 가짜들이다. 소위 '교회' 내의 모든 이들이 주 안에서 형제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안이하고 어리숙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가짜들에게 단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진정한 형제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지만 (엡 5:21)' 복음의 진리를 벗어난 이들에 대해서는 결코 복종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다. 이러한 가짜들의 목적은 '자유하게 하는 법 (약 1:25)' 즉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해서 또 다시 무거운 것들을 짊어지게 하여 '노예'가 되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자유하게 하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소유하며 누리는 자유를 시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많이들 가르치는 여러 규례들 역시 우리를 얽어매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
교회의 기둥들로 여기던 세 사람 즉 야고보 게바 요한 등이 이방인들에 대해 바울에게 부탁했던 것은 십일조나 주일성수나 건축 등이 아니라 다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10절). 과연 우리는 어떠한 복음을 지키려 하고 어떠한 진리를 수호하려고 애쓰고 있나?
주님, 갈라디아인들이 받은 책망을 동일하게 우리도 받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닌 오직 주님의 계시와 부르심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또한 그 진리가 우리를 해방함을 믿습니다. 오늘 주의 종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싸울 것에 대해 싸우게 하시고 양보할 것들에 대해 양보하게 하시며 포기할 것들에 대해 온전히 포기하도록 그들 안에서 과거 베드로와 바울 안에서 역사하셨던 동일한 역사하심으로 힘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