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복음의 진리가 수호되고 뿌리 깊은 종교를 거부하며 대항함 (갈 2:11-21)

11절을 한국어나 영어 몇몇 번역으로 읽으면 마치 바울이 베드로를 크게 나무라는 것으로 들리는데, 원어로 읽으면 느낌이 조금 다르다. 지난 1:1에 분명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되었지만 베드로 역시 사도였고 주님의 수제자였으며 특히 '기둥들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9절)'이라는 말씀 처럼 당시 주님의 동생 야고보와 더불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리더였다. 그러한 베드로에 대해, 소위 '입교'한 시간으로 보면 한참 후배인 것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은 물론 앞으로 누구든 읽게 될 이 서신서에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나무랐다고 기록하는 것은 그가 겸손하지 않은 인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원어를 직역하면 '(갈 2:11)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나는 그의 얼굴에 (대해) (그가) 나무람을 받은 (사람)이 되어 왔음에 대해 그를 대항했습니다' 정도로 된다. 즉 '나무랐다 (동사구)'가 주요 동사가 아니라 '대항했습니다'가 바울이 하고 싶던 말이다. 소위 믿음의 선배라고 후배가 해야 할 말을 못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당시 기둥들 중 하나인 베드로를 대항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진리는 바울에게 또한 동시에 믿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문제인데, 특히 '은혜'를 떠나 다시 '율법'의 행함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한 그의 믿음의 절규를 보여준다.

이런 기록을 했던 바울은 그랬다 쳐도 이렇게 영적 리더로서 숨기고 싶은 자신의 치부가 기록에 의해 만방에 드러난 것에 대해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기둥들 중 하나였던 베드로, 특히 이제 이미 성령을 받고 변함 받았으며 그가 외칠 때 삼천이 회개했던 능력의 종이었지만, 아직도 그 안에는 유대교 즉 '종교'의 어떤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다. 더우기 그는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과거가 있었고, 모든 믿는 이들은 그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는데, 첫째는 믿음의 선후배 사이에서도 진리의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14절)' 말했지만,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했던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에 대한 바울의 당당함을 말해준다. 둘째는 소위 기둥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 진리 앞에서는 항상 겸손하며,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인생임을 알고, 특히 베드로 자신으로서는 과거 다른이들이 알던 모르던 주님을 배반했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12-13절의 내용은 원래 이방인들과 겸상을 금했던 유대교의 가르침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든 은혜의 복음의 진리 보다 더 중시했던 베드로의 실수를 말하는 것이지, 엄연한 죄를 짓는 모임 자체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의 근간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자유함이고 이것은 방종과는 다르다.  동시에 이러한 언급은 바울이 고전 9:20-21에서 복음을 위해서 자신이 여러 사람들 처럼 되었음을 말했던 것과도 다른데, 복음 전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과의 겸상은 전혀 문제가 없음에도 단지 율법의 가르침에 아직도 묶여 있는 것은 위선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4절 부터 21절까지 중요한 내용을 말하는데, 이 부분은 바울이 베드로에게 한 말인지, 아니면 갈릴리인들에게 하는 말인지 문맥상 정확히 알기 쉽지 않다. 아마도 20절의 내용으로 보아 바울이 베드로에게 했던 말은 14절로 끝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무튼 종교적 관습은 정말 그 뿌리가 깊이도 박혀 있는데,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도 이러한 관습은 우리의 행동에 복음의 진리 혹은 진리의 복음 보다 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한 때에 바울의 충고하는 말이 필요하다.

20절은 많이 외우는 구절인데 원어를 바탕으로 재번역하면 '그리스도에 대해 내가 함께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살아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나를 그 아가페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넘겨 주신 그 하나님의 그 아들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도가 되겠다. 개정역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에서 '못 박히다'는 말은 원어에 없고, '십자가에 달리다' 혹은 '십자가형을 받다' 혹은 '나무에 달리다' 등을 의미하는 하나의 동사이며 시제는 완료형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형을 당한 것에는 두 가지 실체가 있는데, 하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그리스도께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실상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 고후 5:14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기록한다.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의 죽으심으로 소위 옛창조인 '아담류'는 모두 주님과 함께 죽었다. 과거 살던 사람들은 물론,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태어날 이들 모두 옛창조 '아담'에게 속해 있다면 주님 죽으실 때 함께 심판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제 주님과 함께 부활 (일어나)해야 한다.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지만 진정한 살아있음은 '믿음 안'이어야 가능하다.

주님, 사람을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외에,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는 것에 대해 대항하기 원합니다. 믿는 이들로 싸우게 하시고 이기게 하소서. 주님의 승리하신 그 승리를 우리가 믿음 안에서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