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본 교리의 중요성, 율법, 믿음, 행위 (갈 3:1-9)

'어리석도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ἀνόητος로 부정을 뜻하는 ἀ와 '알다, 이해하다, 보다' 등을 의미하는 νοέω의 합성어이다. 즉 '이해하지 못하다, 알지 못하다'의 의미인데, 이 단어는 주님께서도 눅 24:25에 사용하셨다. 이와는 다른 단어로 마 5:22의 '미련'이라는 말은 조금 더 수위가 높은 μωρός로 상대방 인격 자체를 모욕할 수 있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던 주님께서 마 23:17과 19절에는 '어리석은 맹인들이여'라고, 또 그 외 몇몇 곳에서 이 단어를 쓰셨는데, 어떤 한 개인에 대해 바로 앞에 두고 쓰지는 않으셨다. 같은 말이라도 한 사람을 지목해서 바로 앞에서 모욕을 주는 것과 확실히 어리석고 무식한 이들을 무식하다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지금 바울은 어떤 개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 흩어진 갈라디아라는 매우 넓은 지역의 사람들, 특히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지려는 사람들에게 이 '미련한다'보다 다소 부드러운 말인 ἀνόητος을 쓰고 있다.

놀라운 것은 소위 '성령 받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문제없을 것이라 여기지만, 2장의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고 2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성령을 받았음에도 '꾀임을 당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고 있음을 말한다. 더우기 3절은 다시 '어리석다'는 말을 하며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묻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히브리서를 읽으며 이러한 것이 분명 발생할 수도 있음을 배웠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같은 것인데 2절 '율법의 행위', 또 다시 동일하게 5절 '율법의 행위'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갈라디아인들은 듣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았음에도 이방인들인 자신들 조차 유대교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는 오해가 있었다. 아무래도 '믿음'과 유대교의 여러 율법과 그에 따른 종교적 의식을 비교해 보니, 종교가 뭔가 있어 보이는데 비해 '믿음'은 너무도 추상적이고 그에 따른 생활은 일상 생활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신 자유함을 다시 종교로 그들 자신을 묶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그것은 육(3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에서 '주다'와 '행하다'는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갈라디아 사람들 안에 그 영을 주고 계시고 그들 가운데 능력들을 역사하시는 이는 지금 현재 그러한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래서 6-9은 다시 복음의 기본을 말하는데, 물론 '성령'은 너무도 중요하지만, 복음의 기본을 제대로 알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모든 것이 '헛되'게 될 수도 즉 유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복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따른 것임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살전 1:3과 살후 1:11에는 '믿음의 역사'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사'는 '행위'와 동일한 '에르곤'이다. 즉 믿음이라고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 '행위'의 근원과 기준이 어디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 '행위' 즉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삶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인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종교'가 되어버리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그의 은혜를 바탕으로 한 복음을 믿을 때 비로소 올바른 '행위'와 '삶'이 나올 수 있음을 말한다.

주님, 얼마나 종교는 멋져 보이고 뭔가 기대하게 하는지요. 하지만 믿음은 수고 혹은 고생을 동반함을 경험합니다. 보이지 않으시고 그 음성을 듣기 힘든 주님을 믿는 것은 기적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이미 해내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구속하신 분도 주님이시고 영원히 인도하실 분도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