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기질에서 벗어나 아들이 됨으로 종교 놀이를 그침 (갈 4:1-11)

지도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에게 무언가 자꾸 하라고 종용하기 마련이다. 종교적 행위를 강조함으로 그들의 권위가 유지되고, 또한 사람들 안에 종교성을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옛 유대교의 전통들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경계한다.

옛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과 여러 의식에 대해 바울은 '후견인들과 청지기들'이라고 말하는데 (2절), 원어에는 ἐπίτροπος (의탁인)와 οἰκονόμος (집 관리자, 눅 12:42 청지기)로 되어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바울이 유대교를 아예 무시하거나 율법을 완전히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때'가 참으로 그러한 옛 것들이 필요없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율법 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들을 위임하셨고, 그에 따라 여러 섬김의 모습들이 행해졌었다. 더우기 οἰκονόμος라는 말은 '경륜 οἰκονομία'과 관계있는 말인데, 과거 율법 역시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때'가 찾기 때문에 새로운 하나님의 경륜, 혹은 원래의 그것이 나타났음을 계속 말하고 있다.

3절의 '초등 학문 στοιχεῖα'을 생명의 삶 해설은 '율법'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는데, 율법도 물론 포함하지만 '세상의 기본 원리'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치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은 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그 기본 원리와 이치들과 더불어, 혹은 그들에 대하여 행하는 지침들이었다.

4절의 '때가 찼다'는 것은 중간에 갑자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아니고 예전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 이제 이루었다는 것인데, 과거 율법은 이제 이 '때'가 참으로 인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여자 밖으로 되심과 또 율법 아래 되심'이 있는데, '여자 밖으로 되심'은 창세기 부터 이미 예언된 말씀이고, '율법 아래 되심'은 5절 말씀 처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구속'이라고 번역했었지만 이제 개정역은 '속량'이라고 번역하는데, 아마도 '구해서 속했다'라는 의미인 '구속'이 '잡아 가둔다'를 의미하는 말과 동음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어는 영어로 redeem으로 번역되었고 신약에는 4번만 나오는 단어인데, 다른 redeem으로 번역된 단어들은 앞에 ex가 없이 eagora이지만 여기는 ex가 있어서 특히 '다시금 사오다'를 의미한다. 먼저는 죄 때문에 인류는 죄에 팔렸지만 (롬 7:14), 특히 율법이 죄를 확실히 정하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팔렸던 인류를 '다시금 사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셔야 했다.

이러한 '속량'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인데, υἱοθεσία라는 단어는 롬 8:15, 23, 9:4, 엡 1:5와 여기 나오며 킹제임스흠정역에서는 '입양', 우리말성경은 '신분' 등으로 번역되었다. 아들 υἱός와 '됨, 둠, 세움' 등을 의미하는 τίθημι의 합성어로 원래 의미는 '입양'이지만, 현재의 '입양'에 대한 인식과는 다르게 고대에서는 이 말이 완전히 아들됨을 뜻했다. 즉 자신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입양을 통해 법적으로 완전히 아들의 명분 혹은 신분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죄사함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러한 '아들됨'을 누리는데, 6절은 이것이 법적인 면은 물론 '영적인' 즉 영과 생명에 대해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6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셨다고 하는데, '영'이 '마음'에 보냈다는 기록은 흥미롭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이나 그 아들의 영을 받기에는 합당하지 않은데, 고후 1:22와 벧전 1:22도 비슷한 말씀을 한다. 분명한 것은 고후 1:22는 먼저 '인치심'이 있고, 벧전 1:22는 '그 영을 통해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혼들이 정화되어 하나의 정결한 마음으로 뜨겁게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인해 가능함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냥 우리 마음에 그 아들의 영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너희가 아들들이므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의 영이나 그 아들의 영이 그 누구의 마음이던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됨을 통과한 이들에게만 해당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6절은 '너희가 아들들 (복수)'로 되어 있지만 7절은 '종'과 '아들' 모두 단수이다. 그래서 '상속자' 역시 단수인데, 아들이면 '하나님을 통해' 혹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상속자라고 한다. 사본에 따라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속자됨은 하나님의 생명을 통한 아들됨이고,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해 그와 동일한 아들됨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단수 '아들'은 후반부에 나오는 사라의 아들과 하갈의 아들과도 연관이 있다. 그래서 많은 아들들이 있지만 모두 단수이다.

8절과 9절은 '그 때는'과 '이제는'이 있다. 하나님을 모르던 그 때는 우리가 죄인들이었고 연약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의 진리를 알고 더 이상 죄인들이 아니라 아들되었음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우리가 아신 바가 되었는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모르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제는 아들로 인정하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전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고 반문하는데, 문자적으로는 '굳건하지 않고 가난한'을 의미한다. 원어에는 '기꺼이 원하느냐'라고 되어 있어서 우리의 받은 바 복음의 진리에서 어떻게 예전 약한 것으로 돌아가기 갈망하는지 반문한다. 이렇게 예전 것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종교라는 것이 우리 육에 너무도 익숙해서이다. 과거 노예 기질을 벗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들과 달들과 절기들과 해들을 삼가 지키'는 종교 놀이를 그쳐야 한다.

주님, 우리를 이미 속량하셨기 때문에 과거 구약 경륜에 따라 주셨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의미나 효력이 없음을 봅니다. 그러한 것들이 보기에는 거룩하고 의미있어 보여서 우리의 노예 기질은 그러한 것들을 갈망하지만, 이제 아들의 신분을 얻은 우리는 그에 따른 삶을 당당히 살 수 있음을 압니다. 주님, 이러한 해방을 믿는 이들이 깨닫고 누리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 온전히 감사하며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