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열심히 추구해야 할 선 (갈 4:12-20)
바울이 가졌던 육신의 연약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15절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안질이 아니었을까 한다. 눈에 질병이 있거나 시력이 약하면 얼굴 인상에도 영향을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들의 여러 성도들은 그를 업신여기거나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신이나 주님처럼 영접했다.
17절은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데,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이들에게도 역시 열심이 있지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좋다 καλῶς'는 '좋다, 선하다' 등을 의미하는 부사인데, 18절에는 그 어원 καλός 즉 '좋은 일'과 '좋으니라'로 번역된 말이 다시 나온다. 많은 때 '일'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원어에는 '일'이라는 말은 없고, 따라서 이 καλός 혹은 καλῶς라는 말이 중요하다. 딤전 3:1에는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라고 하며 여기에는 '선한 일 (에르곤)'이라고 확실히 '섬김, 수고, 사역' 등을 의미하는 '에르곤'이라는 말로 '감독의 직분'과 연결하지만, 우리가 추구하고 열심을 내어야 할 대상은 이러한 '일'보다는 καλός 자체인데, 이 단어는 '선한 선생, 선한 목자, 좋은 터, 좋은 소망, 좋은 약속, 좋은 것' 등 많은 때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쓰인다.
이러한 선에 대해 열심을 내는 것은 '언제든지 선하다'라고 하는데, 이 '열심을 내다'는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로 되어 있어서 우리 자신의 열심이 아님을 말해주고, 이어서 19절은 '나의 아이들이여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어질 때 까지 다시 여러분에 대하여 내가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 (원어 참조)'라고 한다. 즉 이 '선'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바울은 능동적으로 산고를 겪고 있다고 고백한다. 바울의 목적은 사람들을 '낚아' 자신의 수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는 성장을 보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성장은 마치 다시 산고를 겪는 것 같은 수고라는 것이다.
사실 산고는 겪어 보지 않으면 알기 쉽지 않겠지만,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아이를 낳은 후가 오히려 더 힘들다고 고백한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는 불편하고 소화도 힘드는 등 여러 어려움이 따르고 후에는 해산하는 큰 고통을 겪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 부터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오히려 더 손이 많이 가는 수고가 따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아무거나 주면 받고 물고 빨고 하지만, 조금 자라게 되면 분별이 생기고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 믿음의 성숙함도 이와 같아서 그만큼 자랄 때까지는 바울처럼 먼저 선 형제들이 보살피는 것이 필요한데, 동시에 아이같이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은 아이가 엄마와 항상 함께 하면서 모든 것을 배우듯 바울 같이 이끄는 형제들을 항상 대하면서 본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우리들로 '그 선'을 추구하며 열심이게 만든다.
주님, 제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시는 것이 왜 이리 더딘지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능력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