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 (갈 5:1-12)

유대교의 할례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있는데, 아마도 몇몇 파피루스에 할례 의식을 묘사한 그림들 때문일 것이지만,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즉 히브리인들의 출애굽 이후에 이집트에서 할례가 시작되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후 처음으로 명하신 것이 바로 할례였고 (창 17장) 이 때는 이집트 종살이를 하기 훨씬 이전이며, 아브라함은 갈대아 출신이기에 멀리 떨어진 이집트 문화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무튼 이 할례는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에 주어진 명령이었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더불어 유대인들을 구별하는 매우 독특한 행위다.

그런데 바울은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 자유에 대해 굳게 서있으라고 또 다시는 종의 멍에에 묶여지지 말라고 하면서 바로 2절은 '너희가 할례를 받고 있게 된다면(현재진행 수동태)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미래형)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3절에는 '할례를 받고 있는 (현재진행 수동태)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해야하는 채무자이다 (현재형)'라고 한다. 이 말은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는 말씀처럼 이미 할례를 받아서 어쩔 수 없는 사람이나 아직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굳이 할례를 받으려고 하는 이들에 대한 말이다.

바울은 율법이 오기전에 이미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를 율법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율법에서는 출 12:44와 12:48 '종들'과 '타국인들'의 할례에 대해 명하지만, 그 외에는 찾을 수 없고, 오히려 땅에서 나오는 열매에 대한 할례 (레 19:23) 그리고 '마음에 할례 (신 10:16, 30:6) 등이 언급된다. 모세 후에는 여호수아가 광야의 차세대 백성들에 대한 할례가 나오고, 후에는 오히려 '마음'과 '귀'에 할례 받아야 함을 말씀한다 (렘 4:4, 6:10).

바울이 이 할례에 대해 이렇게 율법과 결부시켜 말하는 것은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라는 기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당시 할례는 하나님이 원래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로 의를 이루려는 교만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원어에서는 '율법 안에서 의로워지고 있는 자들'로 되어 있는데,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롬 3:20 말씀처럼 '율법 안에서 의로워지고 있는' 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지만, 이러한 것이 발생한다면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된다.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은혜냐, 둘 중 하나다.

5절은 우리가 '의의 소망을 믿음으로 (밖으로) 기다려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6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이나 율법이나 그 외 어떤 것 '안'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이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을 통해 역사되고 있는 믿음 뿐'임을 말한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가? 믿음 안에 있는가?

흥미롭게도 할례를 계속 언급하며 9절은 '누룩'과 비교한다. 원래 제일 처음 받은 명령이었던 할례를 '누룩'과 비교하다니.. 하지만 이것은 다시 말해 '할례'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와 그 행위에 따라 의를 이루려는 타락한 인생의 어리석음이 순수한 공동체 안에 퍼지려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11절에 바울은 자신이 이제까지 복음이 아니라 할례를 전하고 있다면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물론 이러한 박해는 유대교인들로부터 오는 박해다. 즉 종교인들로 부터 오는 것인데, 소위 말하면 이단으로 찍힌다는 것이다. 할례를 전했다면 '결과적으로 그 십자가의 그 거침은 무효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무효화되다 καταργέω'는 4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의 '끊어지다 (무용하게 되다)'와 같은 말이다. 십자가의 거침 (σκάνδαλον 실족)과 그리스도와는 연관이 있는데, 바울의 삶에서 거치는 십자가가 있던 이유는 과거 구약의 가르침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와 믿음과 진리와 자유를 가르치기 때문이었다.  과거 할례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 앞에 상처받은 겸손함을 추구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죄들을 끝내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는 할례의 효력이 있는 동시에 할례에 대해서는 실족케 하는 것이 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주님, 얼마나 아직도 과거의 것들을 붙드는 이들이 많은지요, 따지고 보면 결국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처사임을 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정하고 추구하며 높이기 원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