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하기 이전에 서로를 사랑해야 함 (갈 6:1-10)
1절은 과오가 드러난 어떤 사람에 대해 영적인 이들인 믿음의 형제들은 그 사람에 대해 온유의 영 안에서 바로 잡아 줄 것을 명하는데, 이 과오를 범한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사람'이고 그에 대한 동사는 '미리 취하다, 넘겨지다' 등을 의미하는 προλαμβάνω로서 수동태로 되어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진리를 거스리고 대항하는 경우가 아니라 하다보니 과오가 발견되어진, 드러나진 경우이다. 이럴 때는 할례를 주장하거나 유대교의 풍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바울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과는 다르게 '온유의 영' 안에서 그를 바로잡을 것을 명한다. '어떤 사람'만 아니라 믿는 형제들도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실수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2절은 '서로 짐들을 지고 있으라 그리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충만하게 하라'고 하는데, 5절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지어야 할 것이다'라고 한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게 들리지만 2절의 '짐들 (복수) βάρος'은 매우 무거워서 혼자 질 수 없는 '무거움'을 의미하는 반면 5절의 짐 φορτίον (단수)은 무겁기는 해도 각자가 짊어질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짐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해야할 일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을 말하는데, 기본적인 책임과 의무를 지는 것은 물론 자신의 십자가도 포함한다. 나의 십자가는 남이 져줄 수 없다. 하지만 공동체의 짐은 서로 힘을 합해 들 때 혹은 나눌 때 가벼워진다.
4절의 '자랑할 것 καύχημα'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보고 기뻐하는 것인데, 이러한 기쁨과 자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되었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랑은 자신만이 누리는 것이고 남에게는 떠벌릴 수는 없는 것인데, 자신만의 어떠한 것이며 그러한 자랑과 기쁨으로 우리는 주님께 찬양하며 영광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자랑이 없는 신앙 생활은 성장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5절에서 각자의 짐은 각자 자신이 져야 할 것이라 말하지만 6절은 짐이 아니라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서로 나누라고 하는데, '말씀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나누고 있으라'고 명한다. 여기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 모두 단수인데, 그래서 이것은 먼저 성령께서 우리의 기름 부으심이 되심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것 (요일 2:27)을 말하며 따라서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교제할 것 (κοινωνέω 코이노니아가 어원)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람 대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 명령의 대상은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 (여격) 모든 좋은 것들을 나눠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물질적인 필요를 포함한다. 이러한 원리는 바울이 롬 15:27에서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같은 κοινωνέω )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기록했던 것과 동일한데 그렇다고 이 구절로 무조건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한쪽이 상대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눔' 즉 고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고후 8:14). 필요 이상 취하는 것은 5장 19-21의 '육체의 일들' 중 하나인 '우상 숭배'인데,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기록한다.
7절 '속지말라 πλανάω'는 '미혹하다 (마 24:4)'와 같은 말인데, 수동태로서 '속임받지 말라' 혹은 '미혹당하지 말라'의 의미다. 그래서 개정역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로 번역했다. 1절 처럼 과오가 드러나면 그래도 괜찮은데, 그렇지 않고 계속 숨기고 있으면 속임받고 미혹당한다. 그래서 폭로되는 것이 훨씬 낫다. 자신의 일이 올바르지 않아도 별일이 생기지 않으면 계속 하게 되는데, 그래서 '무엇을 심고 있던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라고 말한다. 8절은 '자기 육신 안으로 (eis) 씨뿌리고 있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ek 밖으로) 부패함을 추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영 안으로 (eis) 씨뿌리고 있는 자는 그 영으로부터 (ek 밖으로) 영원한 생명을 추수할 것이다'라고 한다. 들어가는 대로 나올 것이라는 말인데, 특히 그 대상이 중요하다. 재물의 부요함은 생명과는 상관없는데 (눅 12:15), 시간이 돈이라고 한다면 '영원한 생명'은 그 어느 재물의 양이나 질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다.
9절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라고 하는데 '낙심 ἐκκακέω'이라는 말은 '밖으로 ἐκ'와 '악 κακός'의 합성어이다. 즉 위의 말씀처럼 지금 선을 행하고 있으니 악으로부터 무언가를 거두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법) 의미다. 그래서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즉 낙담하지 않음으로 정하신 카이로에 추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개정역에 '포기하지'로 번역된 단어 ἐκλύω는 완전히 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완전히 깨어지지만 않는다면 그 정하신 카이로 때에 반드시 추수할 것을 증언한다. 성장도 중요하지만 성장이 더디더라도 우선 현재의 믿음을 지키기만 해도 즉 깨어지지만 않아도 이 뿌려진 씨는 생명이 있어서 언젠가는 자라서 추수하게 될 것이다.
10절은 '그래서 우리가 카이로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모두에게 좋음을 일하고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신앙의 가정들에 대해서이다'라고 한다. 개정역이나 다른 번역본들 처럼 '기회가 있는대로'라는 의미도 있지만, 원어에는 우리가 이러한 카이로를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추수할 그 카이로는 아니지만 '좋은 (아가또스) 것'을 일해내는 것에 대한 카이로는 이미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카이로는 오히려 '그 카이로'가 올 때는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을 행하는 대상은 특별히 μάλιστα 신앙의 가정들로 향하는데, 이 μάλιστα는 '특별히, 우선, 무엇보다 먼저' 등을 의미한다. 구제사역을 하며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고 성경에서 명령하는 것이지만, 바로 옆에 믿음의 가정들이 곤란을 겪고 있다면 공동체가 함께 나눔을 실천해서 씨를 뿌리고 그들의 무거운 짐들을 나눠져야 한다. 많은 때에 우리는 '안으로' 보다는 '밖으로'를 먼저 생각하는데, 우선은 '안으로 eis'가 있어야 '밖으로 ek'도 있다. 주님께서는 '남들을 사랑하라' 혹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고 말씀하셨다. 선교지에서도 현지인을 사랑하는 것 이전에 믿는 이들이 서로 사랑해야 그들은 그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특히 μάλιστα'가 없는 사랑은 현지인들에게 퍼주는 사역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주님, 우리 안에 주님의 아가페로 부요하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부요하신 주님을 이 아침에도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 먼저 선 이들이 우선적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주의 그 아가페를 우리 가운데 소유하게 하소서. 좋은 일을 할 기회가 많은 이 때에 우리가 부지런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게 하소서. 나눌 때 더 풍성해지는 주의 아가페 사랑을 더 깊이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