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할례의 모습들을 은혜로 거부함 (갈 6:11-18)

갈라디아서는 마치 할례로 시작해서 할례로 끝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할례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신약에서 36번 등장하는 이 명사형 할례 περιτομή 라는 단어는 로마서에 12번, 갈라디아서에 7번 나오지만, 동사형 περιτέμνω은 로마서에는 없고 갈라디아서에 다섯번 나온다. 그래서 장수로 따지면 갈라디아서에 가장 많이 나온 것이 된다. 하지만 사실 갈라디아서는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친다 (1:3, 6:18).

바울은 할례가 '육신의 체면'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박해받지 않으려는 처사임을 말한다. 십자가는 치욕이지만 그 능력을 체험한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이고 따라서 자랑이 된다. 결국 다시 '그리스도 예수 안 (15절, 원어 참조)'을 말하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라 오직 새로운 창조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증언한다.

이제는 더 이상 종교적 이유로 할례를 받지는 않지만, 오늘날에도 할례를 대신하는 육신의 자랑거리가 많이, 특히 교회 내에 너무도 널려 있다. 직위나 직권으로 여겨지는 여러 직분들을 비롯해서 세상적인 위치에 따라 정해지는 교회 내의 위치, 그리고 타고난 재능들을 '탈란트'라 여겨서 높이는 것, 그 외에 여러 가지 것들은 은혜의 십자가를 대적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새 창조(물)이다. 새 창조는 십자가를 통과하는, 즉 한번 죽고 부활을 통과하는 것이어야 가능하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 자신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할례가 아니라 '주 예수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흔적들(복수)은 '스티그마타'라는 영화에서 나온 것 처럼 마치 주님의 손에 난 못자국 같은 것이 자신의 손에도 나타나는 (부정적인 면에서) 신비주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 복음을 위해 받아왔던 모진 박해와 목숨을 위협하던 고난들 (고후 11:23-27)을 말한다. 원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찢어 겸손한 자가 됨을 의미했던 할례가 어느덧 종교 의식을 통해 조금씩 변하더니 급기야 육신의 자랑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바울은 진정한 할례를 계속해서 받았고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십자가를 평생 지닌 결과였다.

주님, 오늘날 여러 모양의 할례를 거부합니다.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자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박해받음으로 채우기 원합니다. 주님의 참된 백성들에게 이러한 기본 원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 삶 속의 유일한 자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