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와 둘째가 같은, 한 주 하나님에게서 오는 언약적 향방성 지침인 최대계명

공관복음에 모두 나오는 소위 ‘최대계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기관 중 하나가 ‘계명 중 첫째’를 물었는데, 주님께서는 단지 신 6:5의 ‘계명’만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먼저 4절 ‘들으라 이스라엘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시라’를 말씀하신다. 히브리어 신명기 6:5 와 오늘 말씀 헬라어에는 30절이 ‘그리고’로 시작하는데, 앞 29절 ‘한 주’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가 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은 ‘들어야’ 하는데, 그 듣는 것은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30절 ‘그리고 (너는) 아가파오 할 것이다 너의 그 하나님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가 불가능하다. 하나님 (엘로힘, 복수)께서 ‘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나 혼이나 뜻 힘 등이 나뉘지 않고 그 분을 사랑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히브리 원어는 물론 헬라어 역시 ‘명령형’으로는 이해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동사는 문법적으로 완료형이고 이를 번역한 헬라어 역시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미래형으로 되어있다. 즉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아가파오 할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로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명령으로 이해하고 또 그러기를 노력했는데, 그 이유는 특히 개정역이나 예전 개역한글판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0)’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강령(綱領) 이라는 말을 마치 ‘강한 명령’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국어사전에는 첫번째 정의로 ‘①일을 하여 나가는 데 으뜸 되는 줄거리, 그물의 벼릿줄과 옷의 깃고대로 비유(比喩ㆍ譬喩)한 말’ 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원어에는 ‘강령’이라는 어려운 말 대신에 ‘κρεμάννυμι’ 즉 ‘달려있다’로 되어있다. 이것은 단순히 지켜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 삶의 향방을 알려주는 지침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미래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참 아가파오 할 수 있을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31절은 ‘그리고 둘째는 그와 같으니 (원어 참조)’라고 시작하는데, ‘네 이웃을 네 자신 처럼 아가파오할 것이다 (역시 미래형)’이라고 말씀하신다. 서기관은 첫째 계명만 물었지만 주님께서는 둘째도 말씀하시고 이 둘째가 ‘그와 같다’ 즉 둘째라고 첫째보다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첫째 계명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이들(복수)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 즉 첫째와 둘째 모두가 중요하다고 맺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한 주 (히브리어 “여호와 하나”, 헬라어 “주 하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아가파오 하며 동시에 그 분께서 아가파오 하시는 이웃 역시 아가파오 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 혼 이해 혹은 힘을 모두 동원해도 아가파오 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모든 것을 통해서 한 주 하나님과 이웃을 아가파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 언젠가는 주님처럼 먼저 하나님을 온 존재로 아가파오 하며 이웃 역시 아가파오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 날이 앞당겨지기 원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꿇을 때에도 제 안은 온전히 주님께로 향하고 있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에서 저를 구원하시는 분은 주님의 언약된 명령입니다.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