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생명 나무 (요 19:14-19)
한글 번역본은 거의 모두 '십자가에 못 박다'라고 번역했는데, 원어에는 '못'이라는 말이 전혀 없고 단지 '십자가형 당하다 (혹은 십자가에 처형하다) σταυρόω'이며 어원은 '십자가 σταυρός'인데, 또 그 어원은 '세우다'를 의미하는 ἵστημι이다. 이러한 구분과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못'이라는 말이 신약에 단 두번만 나오기 때문인데, 요 20:25에 도마가 말했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에 명사형으로 단 한번 나오고, '못 박다'라는 동사는 골 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에 역시 단 한번 나온다. '십자가에 못 박다'라고 하면 '십자가' 보다는 '못 박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는데, 이것은 메시야에 대해 구약에서 '나무에 달려 죽는 (행 5:30, 10:39, 갈 3:13, 벧전 2:24)' 것에 대한 예언을 소외시 하게 될 수 있다.
사실 더 자세히 말하면 σταυρός라는 말은 전통적인 십자가 형태가 아니라 '말뚝' 즉 나무를 세워놓은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주님께서 '십자' 모양이 아니라 그냥 전봇대 같은 긴 나무 위에 두 손을 위로하고 돌아가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맞을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십자가'라는 말이 나중에 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생명나무'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보통 '나무'라고 하면 푸른 잎이 무성히 달린 생명체를 연상하며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δένδρον이고 계시록에도 중간 부분에는 모두 이 단어로 되어있지만, 22장의 나무는 ξύλον으로서 땅에 뿌리를 박고 서있는 나무가 아니라 잘려서 목재가 된 나무를 의미한다. 그래서 십자가 σταυρός와도 상통하는데, 흥미롭게도 이 ξύλον은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에서도 쓰였다. 즉 '십자가'가 '목재 나무'이며 결국 '생명 나무'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죽음과 심판과 처형을 의미하는 이 '십자가'가 나중에는 마치 아론의 싹난 지팡이처럼 생명나무가 된다는 것인데,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다는 부분은 모두 '십자가형을 당하다' 혹은 '십자가에 처형하다'로 바꿔야 하며, 그 말씀을 읽을 때마다 '못' 보다는 '나무' 즉 앞으로 우리가 보며 누릴 생명 나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 과거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 죽은 나무에서 생명을 피우셨던 표적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고, 그 나무는 땅의 뿌리에서 끊어진 목재지만 이제 계시록 22장에는 생명 나무가 된 동일한 나무임을 봅니다. 죽어야 산다는 그 역설의 진리가 십자가 그 나무를 통해 이루어짐을 깨닫습니다. 우리 안에 더욱 더 역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