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와 지혜의 문제: 온전을 추구함과 주와 동행함 (약 1:1-11)
야고보서를 흔히들' 믿음에 의한 칭의'를 말한 로마서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오해할 때가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그 첫째 이유가 수신자들이 다르기 때문인데,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이방 성도들을 대상으로 쓴 서신서이지만 야고보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썼다고 1절에 밝힌다.
육신적으로 주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직선적으로 말씀을 전하는데, '흩어진' 이라는 말로 보아 이미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망한 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주님을 옆에서 어릴 때 부터 보면서 성장했던 주님의 동생으로, 요 7: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는 기록 처럼 처음에는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오늘 1절 부터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하며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놓았고, 2장 1절에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하며 자신의 육신의 형이던 주님을 '영광의 주' 즉 과거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하게,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고백한다.
'행위'를 강조하는 것 처럼 보이고, 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쓴 서신이지만 바울이 말했던 믿음과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다. 믿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믿음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당연히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시험은 '믿음의 시련'을 바탕으로 한다. 시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진정성을 의심해 봐야 하는것이며, 결국 이러한 시련은 '인내'를 요구하고, 인내는 궁극적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 목적이라고 한다. 인내는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바로 '온전 τέλειος'해 지는 것이며, 이 '온전함'은 동일한 '믿음'과 '온전 τέλειος'을 말한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구절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러한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지 인내만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함을 야고보는 경험으로 배웠던 것 같은데, 그래서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한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고 말씀하셨는데, '지혜'가 먼저고 '순결'이 나중이다. 사실 '순결'은 '지혜'에 비해 더 쉬운데, 순결은 한면으로 어리숙한 것이고 그에 비해 지혜는 어떤 생각이나 사고력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지만, 정작 야고보는 사실은 생각 보다는 '구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그 근본이고, 그래서 지혜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며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5절에 지혜를 구할 것을 권하며 6절은 '믿음으로 구하라'고 하는데, '의심이 들고 있는 (현재진행형 중간태)' 그 자는 7절에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주께'의 원어는 '~로 부터' 혹은 '밖으로'를 의미하는 '에크'가 아니라 '~로부터 함께'를 의미하는 '파라'로 되어 있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 특히 지혜를 주님께 받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받아 내는' 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주님과 함께 할 때' 얻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지혜는 무엇인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서 받는 것이 아니라 '파라' 즉 주님과 함께 할 때 누리는 것이다.
8절의 '두 마음을 품어'로 번역된 부분의 원어는 '두혼 δίψυχος'인데, 우리의 혼은 인격이나 자아를 의미하지만 이러한 혼이 둘이 될 때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이중인격'을 말하기도 하는데, 결국은 모든 일에 불안정하다.
9절의 '높음'과 10절의 '낮아짐'은 모두 '여격'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지향성을 나타낸다. 즉 낮은 형제는 언젠가는 주 안에서 높아질 것을 믿고 그에 대해 자랑하고 있어야 하며, 그와는 반대로 부자는 그의 낮아짐 안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한다. (원어에는 '자랑하라'는 말은 9절만 있고 부자에 대한 동사는 '지나갈 것이다' 이다) 분명 주 안에서 우리의 신분이 이미 영광스럽게 바뀌었지만, 현실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당장 높아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꽃이 지듯 시간이 지나면 부자들은 낮아질 것이고, 그와 반대로 믿는 우리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주님 처럼 온전함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임을 배웁니다. 단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 목적이 온전함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지혜는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을 경외할 때, 또 주님을 따를 때 얻어지는 것임을 또한 배웁니다. 우리를 온전함과 지혜로 인도하소서. 그래서 세상에서는 낮아짐도 자랑할 수 있는 믿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