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말씀을 자유함 안에서 행하기 위해 되며 받으며 되어지고 있어야 함 (약 1:12-27)

12절은 '생명의 면류관'을 말하는데, 동일한 문구가 계2:10에도 나온다. 과거 개역 한글판에서는 계2:10을 동일하게 번역했는데, 이제 개정역에서는 '면류관'대신 '관' 이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면류관'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원어는 모두 '스테파노 (월계관)'이다. 계2:10에는 이것을 '죽도록 충성하면' 받지만 야고보는 '시험을 견디는 자, 시험을 통해 단련받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받는 것으로 말한다. 이 말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시험을 참고 견디'는 것과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죽도록 충성하다'라는 말은 '죽음까지 믿는다'의 의미인데, 일부러 죽거나 혹은 반드시 순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평생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즉 믿음의 시험들을 통과할 때 받는 다는 의미로 들린다.

12절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행복한 사람 (이다) 그는 시험(2절과 동일하지만 단수)을 참고 있다 그래서 인정되다 (아오리스트, 중간 이태 동사) 생명의 월계관을 얻을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그가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약속하셨다'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행복하다'는 마5의 소위 8복에 나온 말과 동일해서 주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시험을 과거 몇번 참았던 사람이 아니라 현재 시험을 통과하며 인내하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고, 그는 그러한 시험을 통해 인정 받는다. 이 '인정하다 δόκιμος'는 신약에 7번 나오는데 특히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에도 쓰였다. 평탄하고 행복한 삶만 추구한다면 진정 행복한 것이 아니고 또한 인정받는 면에서는 부족하게 된다.

그런데 13절은 '시험 (혹은 유혹)을 받고 있는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시험받고 있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시험'의 동사형인 πειράζω는 '시험하다'의 의미도 있지만 '유혹하다'의 의미도 있는데, 야고보는 삶 속에서 마주치는 여러 시험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신다고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도록) 일부러 유혹하신다고 말하지 말라고 명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라는 부분의 번역이 다소 아쉬운데, 원어에는 '받다'는 말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들, 복수)로 시험하지 않음 이시다' 정도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악에 의해 시험받으신 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쁜 것들로 사람들에게 '어디 이놈들 혼나봐라'는 식으로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즉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생길 때 하나님 탓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오직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 14절은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정욕에 의해 시험받아 멀어지게 되고 미혹당한다'고 말씀한다. 14절은 '정욕'이지만 따라오는 15절은 '그 정욕'이라고 정관사 'he'가 붙었다. 동일한 정욕이 이제는 더 확실해져서 '그 정욕이 잉태하여 죄(단수)를 낳고 있다 그런데 죄가 완성됨으로 사망을 산출하고 있다'라고 기록한다. 결론적으로 16절은 '친애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미혹당하고 있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17절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시고 억압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선한 제공δόσις 그리고 모든 완전한 은총 δώρημα 은 위로부터 이며 빛들의 아버지로 부터 내려오고 있다. (그로)부터는 변함이나 돌아감의 그림자가 없으시다'라고 증언한다. 야고보는 다소 경직되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 인물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심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었다. 소위 확실한 '신관'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분명 유일하신 심판자 이시지만, 그의 백성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변하지 않으시고 모든 좋은 것들로 주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18절은 '(그가) 진리의 말씀에 대해 우리를 그의 피조물등 중 어떤 첫열매 됨 안으로 산출하셨다'라고 기록한다. 그래서 앞에 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의 목적은 바로 이 '어떤 첫열매 됨'이다. 19절은 '따라서'로 시작해서 앞에 말했던 다소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이제 실행적인 면을 말씀하는데, 27절까지 명령어가 (듣기에는 민첩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느린 사람이) '되어라 (19절)',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1절)',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지고 있으라 (22절)' 등 셋이 나온다. 즉 우리는 '되어야 being'하고 '받아야 receiving' 하며 '되어지고 becoming 있어야' 한다.

좀 더 깊이 묵상해 볼 때, 화를 내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는 화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오직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에 대해서만 소위 거룩한 분노를 발산할 수 있는데, 그 외의 성내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하나님 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을 내면 오히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 드러난다. 우리는 다만 우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하게 받아야 한다. 이러한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또한 '행'해야 하는데, 듣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들은 말씀을 행해야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지 않는다. 24절에는 '잊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행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기억해야' 함을 의미하고, 이는 '행함'으로 더욱 각인된다.

그러면 무엇을 행하는가? 당연히 '말씀'을 행하는데, 25절을 개정역에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정관사 없는 그냥 '법 nomos' 이라는 단어로, 야고보는 지금 과거 완전하지 못하고 단지 속박하기만 했던 율법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법' 즉 '생명의 성령의 법 (롬 8:2)'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법은 우리를 자유케 해서 말씀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행함 안에서 행복하게 한다 (원어 참조). 흥미로운 것은 이 법에 대해 원어에는 eis 즉 '안으로' 라는 전치사를 쓰는데, 이는 요한 복음에서 주님을 믿을 때 '안으로' 믿는 것임을 말한 것과 같다. 야고보가 이러한 전치사를 쓰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 즉 이 '법'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26절의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에서 '경건함'은 θρησκός이라는 말로 신약 여기에 단 한번 나오는데 '종교적 혹은 (종교) 의식주의적인'을 의미하며, 그 어원은 '걱정하다, 동요하다'를 뜻하는 θροέω이다. 즉 소위 말해 '종교인'을 가리키는 말로, 믿음이 아니라 단지 종교 생활을 하는 이들은 종교를 가졌음에도 걱정하고 소리지르며 동요한다. 이러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적어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종교인 인지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27절은 다시 '경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26절 후반에도 나오며 위 θρησκός의 여성 명사격이다. 종교적 발로에서 여러 열심이 나오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경건함은 종교 의식을 따르거나 종교 행위 자체가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임을 말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인격이 나오는데 먼저 하나님 그리고 '고아들과 과부들'등 다른 이들, 그리고 나 자신이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과 '함께 (원어 파라)'하는 문제이고,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돌아보는 것이며, 세상에 '대해서는 (원어 아포)' 자신을 지키는, 즉 '관계'의 문제다.

주님, 주님의 풍성한 말씀이 우리 안에서 지켜지며 행해지기 원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오히려 부담만 가중되며 실수만 했음을 경험을 통해 배웁니다. 종교인으로 끝나거나 종교 의식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법을 우리 삶 속에서 적용하기를 배우기 원합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