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들과 함께 하는 그 믿음 (약 2:14-26)
14절 '행위'로 번역된 단어 '에르곤'은 '일, 사역, 행위, 행동, 행함, 수고' 등을 의미하는데, 복수로 되어 있다. 롬 4:5에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기록하는데 여기 '일을 하다'는 '에르곤'의 동사형이다. 서로 상충되는 것 같지만 로마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하는 것에 비해 야고보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자태를 다루고 있다. 행함들이 없는, 즉 실천이 없는 믿음, 바로 그러한 '그 믿음'은 유익도 없고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믿음을 말하면서 신학적이나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기 전에 매우 현실적인 실례를 언급하는데,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단지 말로만 위하는 척 하고 몸이 당장 필요한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17절은 '따라서 또한 그 믿음이 만일 행함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 자신에 따라 죽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 믿음'은 아마도 교리적으로는 진정한 믿음일지 모른다. 하지만 죽어있다. 결국 믿음을 소유하는 문제는 행위들이 따름으로 인정받는다.
19절은 개정역의 매우 잘못된 번역 중에 하나인데, 원어로는 '네가 그 하나님은 하나이심을 믿고 있다 (그러니) 잘 하고 있다 또한 그 다이몬들도 믿고 있고 떨고 있다' 정도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시며 그 셋이 하나시다. 하나님께서 하나이심이라는 말은 그 분의 절대적이며 지존하심을 의미한다. 사탄 즉 '대적자'는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그 다이몬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믿을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그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수긍하거나 동의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도 물론 흔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의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20절은 '그런데 오 허무한 사람아 너는 알아야 한다 그 행함들이 없는 그 믿음은 죽은 것 이라는 것을' 이라고 다시 강조하면서 21절부터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든다. 중요한 것은 22절에서 '그 믿음'과 '그 행함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 믿음'이 '그 행함들 밖으로 (으로 부터, 으로 인해) 완성되었다'라고 하는 것인데, 또 다시 26절은 '영을 떠나서는 그 몸이 죽은 것인 것 처럼 또한 그 믿음이 행함들을 떠나서는 죽은 것이다'라고 결론 짓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볼 문제는 행위가 중요하지만 믿음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믿음에 근거한 행위가 아니라면 유익이 아예 없고, 따라서 행함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믿음에 근거해서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 바른 순서다.
주님, 주님의 은혜를 먼저 받고 누립니다. 그 은혜 안에서 분명한 선한 행위들이 나오기 원합니다. 나의 인간적인 착함이나 측은한 마음이나 선한 의도 보다는 오직 주의 은혜와 믿음에 근거한 행함들이 나와지기 원합니다. 실제적인 필요를 서로 채우며 일하고 역사하는 믿음을 오늘 살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