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와 지혜 (약 3:1-18)

1절은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많이들 선생들이 되지 말라고 명한다. 이것은 권하는 것이 아니라 명하는 것인데, 소위 '선생'이라는 말이 요즘은 별로 권위도 인기도 없는 단어로 전락됐지만, 과거 소위 '군사부일체' 즉 임금과 아버지와 선생이 하나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선생은 한 사람의 삶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목사'라는 말도 '목자와 교사 (엡 4:11)'라는 말의 합성어로 목사는 목양 즉 돌보는 사람인 동시에 선생 즉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러한 일은 절대로 아무나 해서는 안되는데, 다른 이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침으로 따라서 더 큰 (μέγας)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도 '더 큰 정죄 받을 것 (마 23:14, 개정역은 없음)' 이라고 하셨는데 거기에는 '심판'과 '정죄'는 동일한 κρίμα이지만 '더 큰'에 해당하는 단어는 περισσότερος로 '훨씬 더, 크나 큰'을 의미한다. 주님의 은혜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의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이들은 훨씬 큰 심판 혹은 정죄를 받지만, 주님을 믿고 선생된 이들은 그렇지 않은 성도들에 비해서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데, 가르치는 사람은 그 가르치는 것들을 삶에서 보여야 한다.

2절은 선생이 되지 말라는 이유에 대해 '우리 모두가 많이 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시작해서 '말하는' 문제를 언급한다. 성도들은 모두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도 실수가 많고 넘어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의 법적인 위치는 바뀌었지만, 현재는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많은 실수 중에 말에 대한 실수가 두드러 지는데, 만일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이 말은 아예 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말에 실수가 없는, 다시 말해 말하는 것이 성숙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들이 선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또한 몸 전체를 굴레 씌울 수 있다'라고 하는데, 몸 전체 행동 역시 제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굴레 씌우다 χαλιναγωγέω'는 바로 다음 3절 '재갈 χαλινός'과 '물리다 (혹은 가져오다) ἄγω'의 합성어이다.

흥미로운 것은 '말들의 입들 안으로 (원어 참조)' 재갈을 물리는데, '재갈'은 입에만 물리는 것이 아니라 입과 머리 전체를 단단히 휘감아 묶어서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리다 βάλλω'라는 동사를 썼는데, '던지다, 집어넣다'를 의미해서 말들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만 우리에게 순종한다. 이 말은 우리 역시 우리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는 의미이며, 앞 1:9에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명령과 같다. 아무 말이나 막하는 것이 시원해 보이기는 해도 성숙한 것은 아니다.

6절은 원어로 '그 혀, 불, 그 세상' 모두가 주격으로 되어 있다. 즉 이 셋은 동일한 것이고 '불의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체들 안에 조성되어져 있'는, 즉 우리의 실존이 이 '그 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하는데, '삶의 수레바퀴'라고 번역한 부분은 약간 애매한 말이지만, 문자적으로는 '근원의 바퀴'로 삶이 되어져 가는 모든 행로를 말하며 이에 대해 '불사르는' 즉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는 말은 두 가지 면에 그 근원이 있는데, 하나는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의 죄성이 먼저고, 그 다음 우리가 태어나서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들에 영향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우리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슬픈 현실은 이러한 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도 하고 동시에 같은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와는 매우 판이한 것으로 그리하지 말라고 야고보는 명한다.

그러면서 다시 '지혜'를 말하는데, 이미 1:5절에 지혜를 구하라고 권했지만, 이 지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온유함'과 관계가 있고, 이것은 다시 말해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와는 반대가 되는 것들은 14절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것인데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마 12:34)'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진리를 대적해서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하는 말이 진리로 부터 온 것이 아니면 거짓말 하는 것이다.

15절은 원래 '그 지혜'는 위에서 부터 내려 오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땅의 (것), 혼적인 (것), 다이몬(의 것)' 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이 셋을 동일하게 보았는데, '하늘'과 반대되는 '땅', '영'과 반대되는 '혼', 그리고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 (9절)'과 반대되는 '다이몬'을 비교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과 영과 본래 사람의 모습을 지향한다면 지혜롭게 되고 따라서 진리를 말하게 된다.

개정역은 18절을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번역했는데, 원어는 '거두다'가 아니라 '(씨) 뿌리다 σπείρω'로 되어 있다. 즉 '그런데 그 의의 열매는 평강을 행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평강 안에 씨 뿌려지고 있다' 정도가 되겠다. '열매'는 거두는 것인데, 왜 야고보는 '씨 뿌려진다'라고 말했을까? 이것은 이 열매가 우리가 내는 것도 거두는 것도 아닌, 즉 우리의 어떠함의 결과가 아니라 '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에게 '뿌려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에서는 '화평을 행하고 있는 자들'에게 뿌려진다. 우리는 화평케 한다고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원합니다. 주께서 저를 온전히 제어하시기 원합니다. 그 의의 열매가 화평 안에서 저에게도 뿌려지고 있음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