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안에서 올바로 요구하는 자태 (약 4:1-10)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마음이 온전히 깨끗하거나 항상 완전하지는 않다. 오히려 '쾌락'을 추구할 때도 많은데, 서로들 쾌락을 추구하다보니 양보하지 못하고 전쟁들과 다툼들이 발생한다. 여러 노력을 해도 바라는 것을 얻거나 이루거나 소유하지 못하고 여전히 서로들 다투는데, 2절 후반부는 원어로 구하는 주체가 '여러분'이 아니라 '목적격' 즉 그 대상으로 되어 있다. 즉 우리가 구하지 (혹은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즉 '우리 자신'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3절에 그 설명이 나온다. 3절 처음에 나오는 '구하다'는 현재진행형 능동태지만 두번째 '쾌락들 안에서 쓰려고 악하게 구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원어 참조)'의 '구하다'는 현재진행형 중간태이다. 이 말은 무언가를 구할 때 적극적으로 구해야 하는데, 우리 자신이 구하는 그 목적이 쾌락이고 따라서 악하게 구하고 있음을 우리가 이미 알기에 진정한 '우리를' 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구하는 것이 구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서 눈이 벌게서 적극적으로 구하기라도 하지만, 우리는 그것 조차 하지 못한다. 따라서 결국은 얻을 수 없다. 이 말은 뒤에 '두 마음을 품은 자들 (8절, 원어로는 두 혼 된 이을 )'이라는 말로 다시 설명한다.

마음 혹은 혼이 둘로 나뉘는 문제에 대해 4절에도 설명하는데, '간음남들 (남성 복수)과 간음녀들 (여성 복수)' 즉 '간음'을 예로 든다. 간음은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욕정으로 인해 둘로 나뉘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 혹은 하나님과 마귀 둘 중 하나만을 따라야 한다. 9절에는 이러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슬프고 무겁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성령의 열매는 희락 혹은 기쁨이지만, 그러한 영에 속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 세상 쾌락이나 즐거움은 떠나야 함을 말씀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상황상 서로 부딪힌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겸손하려고 하면 다른 이는 교만해서 쉽지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야고보는 1절부터 10절까지 명령어를 10번이나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현실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명령들이 필요하며 또한 그에 대한 순종함이 필요하다. 신앙의 자태는 순종이다. 순종하지 않는 이들은 신앙인이 아니고 따라서 교회 혹은 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 명령은 사실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것인데, 만일 이미 순종한다면 명령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계속 명령해야 한다. 모일 때는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지만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 14:26)'고 하는데, '덕을 세우다'는 '함양' 혹은 문자적으로 '세우다'를 의미한다.  특히 말세에 신앙의 자태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이러한 명령의 말씀으로 세워지고 함양되어야 한다.

주님,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말하지 않고 담대히 가장 필요한 것을 선포하는 야고보를 봅니다. 그는 명하며 요구하고 있고, 우리로 올바른 것을 요구하라고 권함을 봅니다. 이 하루 주께 요구하며, 또 제 자신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마귀를 대적합니다. 제 자신이 나뉘지 않고 하나되어 오직 주님만을 향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