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길이 참는 이들이 행복한 것을 알아야 함 (약 5:1-12)
야고보는 무조건 부자들을 적대시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그는 단지 돈이나 재물이 많다는 이유로 부한 이들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3절 처럼 그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았기 때문인데, 그러한 치부는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여러분의 밭을 가는 일꾼들의 품삯이 여러분들로 부터 지불되지 않음 (원어 참조)'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그러한 다른 이들의 피땀으로 치부한 것으로 그들은 사치하며 멋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는 결국 그들의 마지막이 도살의 날과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들을 살찌웠기 때문에 그 날까지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처럼 부자들의 재물을 강압적으로 빼앗는 것 역시 악한 것이다. 말씀은 부자들이 그 마음을 주 앞에 겸손하게 함으로, 그들의 날에 끝이 있을 것을 깨달아 앎으로 자발적으로 그들의 부를 나눌 것을 권한다.
6절은 '(여러분은) 의로운 이를 정죄했고 죽였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대항하고 있지 않습니다 (원어참조)'라고 하는데, 이 '의로운 이'는 단수이며 그는 '현재' 부자들을 대항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원어에는 '의로운 이' 앞에 정관사가 붙어서 어떤 특정한 한 인물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지는데, '그 의로운 이'는 주님 밖에는 없다. 부자들은 재물이 많은 이들이고 따라서 돈의 힘이 있기 때문에 마음들이 거만해서 법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법을 주무르려 한다. 그래서 '그 의로운 이'를 정죄했고 죽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기 때문에 아직도 그들을 대항하지 않으시고 기회를 주신다.
6절까지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라면 7절부터는 '내 형제들'에 대한 권유인데, '오래 고난 받음'을 말한다. '길이 참으라'고 번역된 단어는 μακροθυμέω로 '길다 μακρός'와 'θυμός 분노하다, 고난받다'의 합성어인데, 잠간 참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길~게 인내하는 것이며 고전 13:4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와 같은 단어이다. 성도들의 열매는 사랑이고, 사랑의 첫째 특징은 정말이지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인데, 부자들은 항상 편하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만 추구하지만, '내 형제들'에게는 그와는 다르게 오래 참을 것들이 많다. 그 오래 참는 것은 '주의 임재 (빠루시아)'까지 인데, 바로 모든 심판과 보응이 있을 그 날이다. 그런데 8절은 그 '임재 (빠루시아)'가 가깝다고 하며, 9절은 '심판자가 문들 앞에 서 계셔 왔습니다 (원어 참조)'라고 말한다. 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이미 2천 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들 앞'이라는 말은 모든 이들의 삶은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그 각자의 삶의 마지막에는 심판자가 서 계심을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즉 소위 '천국 문'이 아니라, 모든 이들은 한번 통과해야할 죽음의 문들이다. 죽음 후에는 '자는' 것이기 때문에 눈을 뜨게 되면 바로 주님의 빠루시아가 임하는 것을 볼 것이다.
11절은 '아십시오'로 시작하는데, 이제까지는 '보십시오'라고 말했지만 여기는 '알라'라고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인내하고 있는 이들은 행복해 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인내는 고생하는 것이고 아직 얻지 못했기에 기다리며 아쉬워 하는 것이라 그리 행복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사실은 행복한 것이라 야고보는 말한다. 적어도 우리는 인내의 이유 즉 그 마지막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더욱 더 '아십시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인내의 이유에 대해 자주 잊는데, 믿음은 기억하는 것이며 계속 알아가는 것이다.
주님, 이 말씀이 저에게 오늘 생명이 되기 원합니다. 알라고 명한 야고보의 그 마음이 만져지고 그 뒤에 계신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참으로 영에 부한 이들이 어떠함을 이 시대에 경험하는 이들이 많아지게 하소서.